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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희생 통한 구원이 가능하다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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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멘데스 감독 영화 '1917'

[이종길의 영화읽기]희생 통한 구원이 가능하다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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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부대에 명령 전달하는 두 전령…단순한 플롯, 배역 구성 등으로 변화

나눠찍은 장면 하나처럼 이어붙이기…'원 컨티뉴어스 샷'으로 전쟁 고발

스탠리 큐브릭 '영광의 길' 속 우유, 나약함 대신 생명수로 상징성 대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처럼 희생 통한 구원 가능하리라 믿어


시체들이 썩어가는 전장. 진흙투성이 쥐들에게는 놀이터다. 시체 썩는 냄새에 취해 찍찍 울어댄다. 그러다 인기척이 나자 조용해진다. 영국군 스코필드(조지 매케이)와 블레이크(딘 찰스 채프먼) 일병의 발자국 소리다. 함정에 빠진 매켄지 중령(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공격 중단 명령을 전달하러 가는 길이다. 촌각도 지체할 수 없다. 아군 1600여명의 목숨이 달렸다.

샘 멘데스(55) 감독이 연출한 영화 '1917'은 전쟁을 다루지만 생명 구하기 여정에 주목한다.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 영국군이 벨기에 플랑드르에서 독일군 전선 돌출부를 공격한 파스샹달 전투다. 영국군은 참호를 활용한 적의 저항과 폭우가 동반된 악천후로 고전했다. 병사 약 30만명을 잃고 고작 8㎞ 전진했다. 그렇게 당도한 도시는 돌무더기일 뿐이었다.


'1917'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두 전령이 가시밭길을 돌파해 다른 부대에 명령을 전달한다. 멘데스 감독은 단조로운 플롯의 약점을 '원 컨티뉴어스 숏(One continuous shot)'으로 상쇄했다. 모든 촬영이 한 번에 끝나는 '원 테이크(One take)'와 달리 장면을 나눠 찍었다. 이를 교묘하게 이어붙여 한 장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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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두 전령이 명령을 받으러 가는 길부터 함께 한다. 여러 위기를 모면하며 산란해진 두 전령의 얼굴을 자세히 포착한다. 죽음의 땅을 유려하게 가로지르며 전쟁의 참상도 목도한다. 폭격으로 생긴 물웅덩이, 산산이 부서진 건물과 포대, 시체들이 떠다니는 도랑, 피 맺힌 철조망…. 하나같이 '원 컨티뉴어스 숏'에 의해 실시간으로 나타난다.

멘데스 감독은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고자 배역 구성에 변화를 줬다. 블레이크는 친근하고 여유가 넘친다. 주어진 임무에 남다른 사명감을 보인다. 친형 조셉(리처드 매든) 중위가 매켄지 중령 부대에서 복무하는 것으로 설정됐다.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와 달리 개인사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입체감이 결여된 느낌마저 있다. 이는 사실 멘데스 감독이 의도한 바다. 관객이 스코필드가 느끼는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여 함께 호흡하도록 설계했다. 스코필드가 조그만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여기 있다. 관객이 '원 컨티뉴어스 숏'에서 흘러나오는 긴장을 체감하며 참상을 직시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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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지만 생각이나 행동에 큰 변화가 없다. 우연에 의존하는 비중마저 높아 내러티브적으로 전쟁의 본질을 가리키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영광의 길(1957)' 롱테이크 장면 등을 오마주(존경의 표시로 시도하는 모방 또는 인용)했으나 정작 본질은 희미해진 것이다.


'영광의 길'은 전투 장면도 장대하게 펼치지만 참상의 근원을 파고드는 데 집중한다. 이 또한 배경은 1차 세계대전. 프랑스군의 미로 사단장(조지 맥레디)은 명예를 얻고자 무리하게 개미고지 탈환에 나선다. 그의 계획은 끔찍한 희생을 야기한다. 병사들이 돌격을 거부하자 그는 아군 참호에 대포를 발사하라고 명령한다.


미로 사단장은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돌격 명령을 거부한 병사들까지 색출해 처형하려 든다. 이때 선봉에서 병사들을 지휘한 닥스 대령(커크 더글라스)이 변호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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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큐브릭(1928~1999) 감독은 두 인물의 대립으로 인간의 삐뚤어진 욕망과 비겁함을 드러낸다. 삐뚤어진 욕망과 비겁함을 전쟁 촉발 요인으로 부각하며 무고한 희생을 고발한다.


미로 사단장은 병사들을 색출하기도 전에 사형부터 거론한다. 군사재판은 당연히 형편없이 진행된다. 증거를 가져올 수도, 증인을 데려올 수도 없다. 기소장을 내는 절차마저 생략한다.


"일부만 갖고 따지지 말게, 대령. 자네 부대 절반이 참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야. 중대당 열 명씩 군사재판에 회부해 용기 부족으로 사형에 처하도록 하겠네. 놈들은 피 대신 우유가 흐르는 게 틀림없어."


'1917'의 주제의식은 '영광의 길'과 다르다. 그것은 이야기보다 상징물로 자주 대체된다. 스코필드가 파괴된 마을에서 아이를 키우는 프랑스 여인에게 건네는 우유가 대표적인 예다. 나약함을 가리킨 '영광의 길'과 달리 생명수로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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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눈여겨봐야 할 상징물은 나무다. 나무는 '1917'의 처음과 끝을 장식할 정도로 자주 나온다. 두 전령이 작전 수행 중 보는 나무 대부분은 훼손됐다. 독일군이 작전상 후퇴하며 적의 물자나 자원으로 사용될 것을 우려해 잘라버렸다.


과수원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블레이크는 개의치 않는다. "이 나무들은 다 죽은 거야?"라는 스코필드의 물음에 "다시 자랄 거야. 전보다 더 많이 자랄 거야"라고 답한다.


나무로 처음과 끝을 장식한 대표적인 영화는 옛 소련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1932~1986)의 '희생(1986)'이다. 알렉산더(얼랜드 조셉슨)는 아들 고센(토미 젤크비스트) 앞에서 쓰러진 나무를 일으켜 세우며 말한다.


"아주 먼 옛날 한 수도원에 늙은 수도승이 살고 있었단다. 그는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산에 심었단다. 그리고 제자에게 말했지. 나무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매일 같이 물을 주도록 해라. (…) 그렇게 3년 동안 물을 주다가 어느 날 나무에 온통 꽃이 만발한 것을 발견했단다. 끝없이 노력하면 결실을 얻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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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는 희생을 다짐한다. 3차 세계대전을 앞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다. 간절한 기도가 이뤄지자 그는 약속대로 집에 불을 지른다. 헌신은 실어증에 걸린 고센이 말문을 여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1917'이 말하는 희망은 여기에 있다. 스코필드는 큰 절망을 목격하지만 나무를 보며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다. 희생을 통한 구원이 여전히 가능하리라는 믿음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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