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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counter] 詩야 너는 알고 있니? 生의 열망과 절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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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허진석 세번째 작품집 곳곳엔 그리움의 흔적들

[Encounter] 詩야 너는 알고 있니? 生의 열망과 절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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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은 198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그러니까 그는 흔히 문단이라 일컬어지는 자리에 발을 들인 지 서른 해를 훌쩍 넘긴 중견 문인일 것이 틀림없지만, 얼마 전 세상의 빛을 본 '아픈 곳이 모두 기억난다'가 이제 겨우 세 번째 시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적잖이 놀라게 될 것이다.


그러고는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허진석은 시어 하나하나를 혼신의 힘을 다해 빚어내는 과작(寡作)의 예술가이거나, 혹은 시적 염결성과 예술적 자의식이 지극히 과민하여 세속적 이해타산에 밝지 못한 사람이 분명할 것이라고. 당신의 저 두 가지 생각은 모두 틀렸다. 시집 맨 앞머리에 적힌 '시인의 말'을 보라.

"양철로 접은 날개를 달고/모르는 곳을 날아다니다가/엔진이 아파 내려왔다//왼쪽 젖꼭지에 해 박은/나사못 하나가 튀어 나왔다//맞는 게 하나도 없다"


허진석은 오랜 세월 동안 세계 곳곳을 누비며 스포츠 경기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기자로 살아왔다. 그 현장이 주로 해외의 장소일 수밖에 없으리란 느낌은 "양철로 접은 날개를 달고/모르는 곳을 날아다니다가"라는 앞머리의 문양들에서부터 솟아난다. 또한 그 뒤에 이어지는 "엔진이 아파 내려왔다"는 것은 결국 그가 기자 생활을 그만두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이미지일 것이다.


그렇다. 그는 1988년 서울신문 기자로 일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오래 몸담았던 중앙일보를 거쳐 올해 8월30일 아시아경제신문에서 퇴직할 때까지 30년이 넘는 그 긴 세월을 내내 기자로 살았다.

그러니 "엔진이 아파 내려왔다"는 말은 그저 하던 일을 멈추거나 직업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후반부를 장식하고 있는 "왼쪽 젖꼭지에 해 박은/나사못 하나가 튀어 나왔다//맞는 게 하나도 없다" 같은 웅숭깊은 이미지들을 꿰는, 그의 생 전체, 그 마디마디에 얼룩진 어떤 회한이 격렬하게 응집되어 있는 시의 눈, 시안(詩眼)이다. 그는 오래전 "왼쪽 젖꼭지에 해 박은" "나사못 하나"를 들고 이제야 비로소 시의 바다, 그 혼돈과 열망의 파도 속으로 뛰어들려는 선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끄트머리에서 처연하게 휘날리는 "맞는 게 하나도 없다"는 불협화음의 목소리가 뜻하는 것 또한 이와 같다.


그리하여, 저 시안에는 두말할 것 없이 30년이 넘는 그 긴 시간 내내 그의 가슴 밑바닥에서 용솟음쳤을 시에 대한 그리움, 아니 시인과 예술가의 운명에 대한 결핍과 열망이 동시에 주름져 있다. 그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뒷자락에 드리워진 처연함 또한 그만큼 깊다. 우리 모두의 생에 도사리고 있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선의 불가항력적 위력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존재로서 우리 자신을 깨닫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이 시집이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유와 배경 역시, 우리 모두가 제 생에서 느끼고 부대껴온 무수한 열망과 절망과 그 결핍의 사연들, 그 존재론적 그리움의 세계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 생이 마주할 수밖에 없을 희로애락의 드라마를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한 길의 이미지로 소묘하는 자리에서 오는 것이리라. 이 시집에 등장하는 "브레슬라우" "오버함머스바흐" "방콕" "키르기스스탄" "암스테르담" "보덴제" 같은 무수한 외국 지명이나 그것이 환기시키는 이국 정서에서 단박에 알아챌 수 있듯, 시인은 제가 살고 있는 거주지를 떠났다가 되돌아오는 탈향과 귀향의 이미지들을 반복 변주하기 때문이리라. 아니, 저 여로의 이미지들이란 시(詩)라는 그의 존재론적 원적(原籍)을 찾아가는 원초적 그리움의 흔적일 수밖에 없기에.


이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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