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두 차례에 걸쳐 서구사회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려 시도했다. 한 번은 전쟁을 통해서, 한 번은 경제발전을 통해서다. 첫 시도는 실패했지만 지난 수십 년간 일본은 세계의 우상 국가로서 지위를 누려왔다. 세계인들은 일본을 소비하고, 기업들은 일본의 경영방식을 배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하지만 최근 일본의 경제성장이 정체되고 극심한 노령화가 진행되면서 세계는 조심스러운 눈으로 일본의 미래를 주시하고 있다.
최근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불러일으킨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는 일본인의 자신감과 우월감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추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종이 한 장 차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음모론을 퍼뜨렸다. 심리학적 연구에 의하면 음모론을 잘 믿는 사람은 무력감과 상대적 박탈감이 심하고, 높은 불확실성과 함께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약하다. 또 자기도취적인 심리를 가진 사람일수록 음모론을 잘 믿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방해하는 세력이 항상 주변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들을 방해하는 세력은 대개 그 사회의 약자들이거나 공격할 의사가 없는 주변 국가들이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이들은 약자를 괴롭히면서 우월감을 느끼고 불안감을 해소한다.
집단의 불확실성을 가장 손쉽게 해소하는 방법은 외부에 적을 만드는 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이 발생했을 때 미국인들의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했다. 하지만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자 우울증과 자살률은 극적으로 감소했다. 집단의 불확실성이 외부의 적이나 경쟁자를 향한 공격성으로 전환될 때, 복수는 집단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해독제가 된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가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을 보복 대상으로 삼은 것이라 믿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일본의 보복조치에 대응하는 태도다. 국민 여론은 일본의 보복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우세하지만, 이를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불매운동같은 감정적 대응을 자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의 논리 속에는 실력주의(meritocracy)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일본과 한국은 실력에서 엄연한 차이가 나며, 이런 상황에서는 강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실력주의에 대한 믿음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자각은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자신감과 희망으로 이어진다. 반면 사람들로 하여금 구조적인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하고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2003년 연구에 따르면 실력주의에 대한 믿음 가진 사람들은 대개 기득권층이다. 이들은 실력주의 사고방식을 전파함으로써 자신이 가진 지위와 권력을 정당화한다. 자신들은 정당한 실력으로 지금의 지위와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내부에서 적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외부 요인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내부 구성원들에게 화살을 돌리는 사람들은 어느 사회에나 있다. 실력이 모자란다는 자기 비하를 넘어 다른 사람들의 능력을 비난하고 국가와 정부를 공격하는 것이다. 정파와 이념을 떠나 이런 행위는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원초적인 불안 심리를 가지고 있다. 섬은 온통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지진을 일으키는 지각활동이 빈번하며, 주변에는 우호적이지 않은 나라들이 산재해있다. 적에게 포위돼있다는 피포위 심리(siege mentality)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자연과 경쟁자로부터 언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이들의 강박관념이 대륙 진출의 꿈을 만들어냈다. 대륙으로 진출하려면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돼야 한다. 일본의 우익 정치인들이 끊임없이 개헌을 시도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다시 이 꿈을 실현하려 들 것이다. 그 수단이 전쟁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이용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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