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뒷받침 안 된 IB, 금융위기 이후 흔들…각종 스캔들 연루
구조조정 비용만 74억유로…2년간 배당도 보류
IB 고객·직원·기술 BNP파리바로 양도 협약 진행 중
[아시아경제 김은별 기자] 독일 최대 은행 도이체방크가 1만8000명의 대규모 감원을 단행한다. 글로벌 주식거래 부문에서 철수하고 투자은행(IB) 부문도 대폭 줄이기로 했다. 1995년 기업금융중심투자은행(CIB) 체제를 구축한 후 20여년 만에 IB 부문을 사실상 포기한 셈이다.
7일(현지시간)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도이체방크는 이날 이 같은 내용의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계획에 따르면 회사 측은 2022년까지 1만8000명의 인력을 줄이게 된다. 전체 인력의 20%에 해당하는 규모다.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의 인력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IB 부문도 대폭 축소한다. 글로벌 주식거래를 중단하고, 채권과 통화거래는 최소 수준으로만 유지한다. 이를 예고하듯 지난 5일 도이체방크 측은 가스 리치 IB 부문 대표가 이달 말에 사임한다고 밝혔다.
철수한 IB 사업의 일부는 프랑스 BNP파리바에 넘긴다. 도이체방크는 이날 성명서에서 "BNP파리바와 예비 계약을 맺고 있는 단계"라며 직원ㆍ기술 양도를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다만 도이체방크는 이 협상이 완료된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크리스티안 제빙 도이체방크 최고경영자(CEO)는 기자회견을 통해 "오늘 우리는 수십 년 만에 가장 근본적인 변화를 발표하게 됐다"며 "도이체방크의 명성을 되찾겠다"고 밝혔다.
◆IB 사실상 포기 선언= "우리는 원점으로 회귀한다."
제빙 CEO는 이날 대규모 감원 계획을 발표하면서 "고객 거래를 중심으로 한 독일 은행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겠다"고 밝혔다. IB사업을 사실상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독일 도이체방크는 한때 JP모건, 골드만삭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 글로벌 IB였다. 금융 위기로 글로벌 은행들이 위기에 처한 가운데서도 거의 유일하게 실적 호조세를 기록한 은행이다.
유럽계 은행의 자존심이던 도이체방크의 몰락은 골드만삭스를 넘어서겠다며 추진한 IB 부문의 지나친 확장 탓이다. 도이체방크의 IB 사업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금융 위기 이후다. 공격적으로 조직을 키웠지만 IT나 오퍼레이팅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못한 상태에서 위기에 직면하자 은행 전체가 휘청거렸다. 여기에 주택담보증권(MBS) 불법 판매로 미국 법무부로부터 거액의 벌금을 부과받으면서 경영 불안에 빠졌고, 최근에는 금리 조작, 러시아 돈세탁 등의 스캔들에도 연루됐다.
관료주의적 문화에 젖어 의사 결정이 신속히 이뤄지지 못한 것도 수익성에 악영향을 미쳤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도이체방크의 IB 인력은 골드만삭스와 같은 수준인 3만8300명이지만 수익은 골드만삭스가 1.5배 더 많다. 도이체방크의 IB 오퍼레이팅 비용은 지난해 매출의 95%를 차지해 55%인 JP모건과 비교하면 효율성이 떨어진다.
위기가 계속되면서 도이체방크는 2017년까지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고 주가는 올해 들어 최저치 경신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난해 4월 제빙 CEO가 취임하면서 인력 감축 계획을 발표했지만 개선의 여지는 보이지 않았다. 제빙 CEO는 코메르츠방크와의 합병을 시도했지만 노조의 반대로 무산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제빙 CEO와 자문위원들이 지난해 말부터 합병 무산 시에 대응할 '플랜B'를 고민해왔고, 악순환을 끊는 방법으로 IB 부문 축소가 떠올랐다고 전했다.
◆기업거래·자산관리 확대…"너무 늦었다" 지적도= 도이체방크가 내놓은 자구 방안은 ▲IB 부문 축소 ▲비핵심 자산 매각 ▲기업은행과 자산 관리 부문 확대 ▲비용 절감 ▲배당 연기 ▲대규모 임원 교체 등이다. IB 부문은 기업 자문, 외환 거래에만 중점을 두고 주식이나 채권 거래는 중단하기로 했다.
향후 도이체방크의 사업은 기업 거래와 금융 자문에 집중된다. 채권 및 통화 거래도 최소 수준으로만 유지할 방침이다. 중단한 사업은 BNP파리바로 넘긴다. 기업 거래에서 위험가중자산도 40%까지 줄일 방침이다. 도이체방크는 "앞으로 IB 수익의 75%는 상위 5위 기업에서만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도이체방크가 자산운용 브랜드 DWS를 키우기 위해 스위스 UBS와의 부분 합병에 대한 논의가 진행중이라는 설도 나온다. 도이체방크는 DWS를 키워 세계 순위 10위 안에 들게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740억유로(약 97조6000억원)의 위험자산을 정리하기 위한 배드뱅크(부실채권전담은행)도 설립하기로 했다. 이는 대차대조표의 40% 수준으로 기존에 예상했던 규모보다 훨씬 크다. 초기 구조조정 비용 30억유로로 2분기 순손실은 28억유로에 달할 전망이고, 구조조정 비용은 2022년까지 74억유로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도이체방크는 "특별배당이나 주식환매로 2022년부터 50억유로의 자산을 주주들에게 돌려줄 것"이라며 주주들을 달랬다. IB 부문 대표, 최고규제책임자(CRO), 소매 부문 대표, 미국 사업 담당자, 디지털ㆍ데이터혁신 담당자, 규제 책임자 등 임원들도 대거 교체된다. FT는 "1999년 미국의 뱅커스트러스트를 인수한 후 20년간 열정적으로 사업을 확장했던 도이체방크가 급진적인 개혁을 하게 됐다"며 "도이체방크가 도박을 위한 마지막 주사위를 던졌다"고 전했다.
그러나 결정이 이미 너무 늦었다는 지적도 있다. 기업 거래에 충실하겠다고 했지만 유럽 금융시장이 순탄치 않기 때문이다. 독일 국내에서는 공적금융과 지역 금융기관이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데다 프랑스 BNP파리바, 이탈리아 유니크레디트 등과의 경쟁도 치열하다. 만일 코메르츠방크가 독일이 아닌 다른 국가의 은행과 합병하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진다. FT는 "유럽중앙은행(ECB)에 의한 초저금리 정책이 장기화되고 있어 기업 거래로 수익을 낼 수 있을지도 미지수"라고 전망했다.
김은별 기자 silversta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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