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배터리 업체들이 북미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에 나섰지만, 조만간 과잉 생산의 ‘덫’에 빠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국내 3사의 북미 지역 공장 건설이 예정대로 진행되면 2025년부터 전기차 약 70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생산능력을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미국 전기차 시장은 그 속도를 따라올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자동차 전문 시장조사기관 EV어댑션(EVAdoption)은 미국 전기차 시장이 지난해 85만대에서 2025년 205만대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도 2025년에 미국에서 전기차 350만대가 팔릴 것으로 본다.
여기에 테슬라에 배터리를 공급 중인 일본 파나소닉을 비롯한 배터리 업체들도 생산 설비를 늘리고 있다. 수요보다 공급이 늘면 가격이 내려가고 수익성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배터리 과잉생산 상황에 봉착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선제적으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국내 배터리 3사의 북미 생산능력은 2년 뒤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작년 말 생산능력은 61.5GWh다. LG에너지솔루션 이 미시간 공장에서 40GWh를, SK 온이 조지아 1,2공장에서 21.5GWh를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갖췄다.
완성차 업체들과 합작 공장이 가동을 시작하는 2025년 3사의 생산능력은 463GWh로 급증한다. LG에너지솔루션은 제너럴모터스(GM)와 합작사인 얼티움셀즈 등이 운영을 개시하면서 배터리 생산능력 255GWh를 갖추게 된다. SK온도 포드, 현대차와 합작을 통해 185.5GWh를 생산할 능력을 갖춘다. 삼성SDI 는 생산설비 23GWh를 스텔란티스와 합작 운영한다.
배터리 생산능력 1GWh는 전기차 1만5000대를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3사 생산능력만 대략 695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물량이다. 지난해 미국 전체 자동차 판매량(1373만대)의 절반에 육박하는 양이다.
일본, 중국업체들도 북미 진출에 적극적이다.
미국 네바다주와 캔자스주에 공장을 가지고 있는 파나소닉은 오클라호마주에 세번째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스텔란티스, BMW 등과도 배터리 공장 설립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업체인 CATL도 테슬라와 포드 등 완성차 업체와 합작 방식으로 미국에 배터리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다.
완성차 업체들도 북미에 독자적인 배터리 생산 공장을 만들 계획이다. 테슬라, 포드, 폭스바겐, 도요타 등이 뛰어들었다. 테슬라는 네바다주 기가팩토리 인근에 36억달러(약 4조7000억원)를 투자해 연간 200만대분의 신형 4680배터리를 생산할 수 있는 배터리 공장과 전기트럭 공장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폭스바겐도 200억 캐나다달러(약 20조원)를 투자를 투자해 캐나다 온타리오주 세인트 토머스에 대규모 배터리 공장 건설할 계획이다. 생산 규모는 90GWh로, 연간 100만대 이상 전기차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다. 포드도 미시간주에 배터리 개발센터를 설립, 자체 배터리셀 생산을 타진하고 있다.
북미에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배터리 생산설비가 들어서는 이유는 IRA 시행에 따른 혜택을 받기 위해서다.
IRA는 북미 내에서 배터리 부품을 생산·조립하거나, 북미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에서 핵심 광물을 추출·가공하는 등 조건을 충족하면 전기차 구매자에 최대 7500달러(약 1000만원)의 보조금을 준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배터리 업체는 kWh당 셀은 35달러, 모듈은 10달러를 생산세액공제(AMPC)로 받을 수 있다. 혜택을 누리려면 현지 공장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과잉공급 문제에 직면할 위험성도 커지고 있다. 미국 환경보호국은 2032년까지 전기차를 신차 판매량의 3분의 2인, 67%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갈 길이 멀다. 지난해 미국에서 판매된 신차 중 전기차 비율은 5.8%에 그쳤다. 미 정부는 아직 내연기관 자동차 퇴출 시기도 공식화하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 소비자들은 전기차에 관심이 떨어진다. 시카고대학교 연구여론센터가 최근 실시한 소비자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47%는 다음에 전기차를 구매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답했다. 전기차 구매를 꺼리는 이유로 비싼 차량 가격과 충전소 부족을 꼽았다.
미국에서 전기차 보급 속도가 예상보다 느려지면 배터리 양산 계획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원자재 공급망이 취약한 국내 기업들은 운영비용 뿐만 아니라 재고 증가, 가격 하락 등 위험을 고스란히 떠안게 될 것으로 우려된다. 다만 배터리 공장이 완공 직후 100% 생산을 하지 못하는 만큼 어느 정도 속도 조절은 가능하다는 지적도 있다.
박철완 서정대 교수는 "빠르면 2024, 2025년 과잉생산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데 이를 대비한 플랜B가 필요하다"면서 "미국에서 수요가 늘지 않으면 현지에서 생산한 배터리를 유럽이나 아시아에 공급할 수 있게 하는 등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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