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피해자 답지 않다"고? '피해자다움'이 대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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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윤신원 기자] 검찰이 지난 2013년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특수강간 혐의에 대해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당시 검찰의 판단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다.


지난 2013년 11월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는 건설업자로부터 성접대를 받은 혐의로 김 전 차관을 송치했다. 하지만 4개월 만에 검찰은 “피해자들이 성폭행 피해를 당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김 전 차관을 불기소 처분했다.

검찰이 당시 피해자들을 판단한 근거는 이렇다. ▲김학의·윤중천이 속옷 차림으로 있었는데도 그곳에서 바로 나오지 않았다는 점 ▲피해 직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점 ▲사건 이후에도 건설업자와 1~4년간 만남을 지속했다는 점 등 피해자들의 태도가 일반적인 성폭행 피해자의 태도로 해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당시 피해자들이 "윤중천이 수시로 심한 폭행과 욕설을 일삼았고, 성폭행 장면을 촬영해 유포하겠다고 협박했다"고 진술했음에도 검찰은 이런 피해자들의 특수한 상황을 무시한 채 '피해자다움'만을 강조하며 불기소를 결정한 셈이다.


이렇듯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피해자다움'은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 이후 줄곧 뜨거운 논란거리였다. 특히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을 고발한 김지은씨 사건으로 ‘피해자다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심 재판부가 안 전 지사의 범행 전후의 김지은씨 태도에 대해 “피해자라고 볼 수 없는 행동”이라고 판단해 안 전 지사를 '무죄'로 판단한 것이다. 당시 ‘피해자답지 않았다’고 명시한 판단의 근거를 보면 ▲성폭행 피해 다음날 아침 안 전 지사가 좋아하는 순두부 식당을 알아본 점 ▲안 전 지사가 이용하던 미용실에서 머리를 손질한 정황 등이다.

'비공개 촬영회'를 폭로한 유튜버 양예원씨 사건도 마찬가지다. 양씨가 성폭력을 당하고 난 뒤 남자친구와 여행을 다녀오자 일부 누리꾼들이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이 보일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여론 재판에서는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이 진짜 미투와 가짜 미투를 판별하는 기준이 돼버린 셈이다.


하지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것은 '고정관념'이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최근에는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성인지 감수성은 지난해 4월 대법원 판결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다. 성희롱과 성추행으로 해임당한 한 교수가 억울하다며 제기한 소송에서 대법원은 '성인지 감수성'이란 개념을 제시하며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한 것이다. 즉 성범죄 피해자가 처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뜻으로 만약 피해자 진술이 오락가락한다고 보이더라도 법원은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얘기다.


다만 일부 남성들 사이에서는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불만을 내비치기도 한다. 무고 사건이 증가하면서 피해자의 진술만을 토대로 판단하다 보면 억울한 가해자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다.


또 성인지 감수성이란 개념이 법적으로 정의된 단어가 아닌 만큼 구체적인 판단 기준이 애매모호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사건마다, 혹은 사람마다 성인지 감수성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를 수 있어 아직은 단순한 단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이번 김 전 차관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작업 속도는 더욱 빨라질 전망이다. 19일 박상기 법무부장관과 김부겸 행정안전부장관이 해당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위해 조직의 명운을 걸고 수사하겠다고 공언했다.





윤신원 기자 i_dentit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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