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든 이불을 빤다
무거운 이불 한 채 물에 불린다
모란 잎 때 절은 이파리
고무통에 담그니 발바닥에 풋물이 든다
모란꽃이 쿨럭쿨럭 거품을 토해 낸다
고무통 수북이 거품이 솟는다
맥을 짚듯 두 발로 더듬는다
거기 먼 기억 속 삶에 찌든 내가 밟힌다
부드러운 섬모의 숲을 거슬러 얼룩진 기슭에 다다르자
작은 파문 일렁인다
나비 한 마리 날지 않는 행간
지난날 부끄러운 낱말 밟히며 밟히며
자백을 한다
좀체 읽히지 않던 젖은 문장들
발로 꾹꾹 짚어 가며
또박또박 나를 읽는다.
■빨래를 하자. 이불 빨래를 하자. 입추 지나 말복도 지났으니 제아무리 유별나게 무더운 여름이라 해도 이제 곧 선선하게 저물 것이다. 그러니 얼마 남지 않은 쨍쨍한 여름 볕에 얼른 이불을 빨아 내다걸자. 바지랑대가 휘청거리도록 봄가을 이불도 겨울 이불도 새삼스레 꺼내 빨아 널자. 그 이불들을 덮고 우리 다시 사랑하고 울고 한숨짓고 끌어안고 잠들 것이니 "거기 먼 기억 속 삶에 찌든" 나를 꺼내 척척 빨아 널자. "지난날 부끄러운 낱말"들을 마음속에 쟁여 두고 걱정만 하지 말고 "발로 꾹꾹" 빨아 하루가 아까운 여름 햇살 아래에다 차라리 활짝 펼쳐 놓자.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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