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빅데이터 쌓아놓고 환자 맞춤치료 활용도 못한다

[규제의 민낯⑦]뒤처진 보건의료 빅데이터 활용

-유전체·임상·생활습관 등 정보, 만성질환 예방 ·맞춤형 치료 활용땐 5년간 최대 2조650억 의료비 절감효과
-개인정보보호법·생명윤리법 등에 막혀
-업계 "정부 공개정보는 도움 안 돼"
-보건의료 빅데이터 활용 접점 못찾아
의료 빅데이터 쌓아놓고 환자 맞춤치료 활용도 못한다 원본보기 아이콘


[아시아경제 박혜정 기자] "우리나라는 활용성 높은 보건·의료 빅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보건 당국)
"정부가 공개하는 의료 정보는 가치가 없다."(의약업계)보건·의료 분야는 빅데이터에 대한 수요가 많은 분야로 꼽힌다. 질병 극복과 건강보험 재정 절감 등 파급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정부와 업계 모두 '정밀 의료'가 미래 의료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핵심인 보건·의료 빅데이터 활용에 대해서는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공공 데이터를 개방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업계는 '도움이 안 되는 수준'이라며 혹평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미래 의료, 빅데이터 활용에 달렸다" 한목소리= 정밀의료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과 개인의 유전체 정보, 임상 정보, 생활습관 정보 등을 활용해 환자 맞춤형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정밀 의료 현실화는 보건·의료 빅데이터 활용도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의 생활습관 정보, 유전체 정보 등을 분석해야 질환이 생기는 원인을 파악할 수 있어서다.

이렇게 되면 한국인 유전체에 맞는 치료제가 개발되고 '효과 없는' 치료도 줄어 건강보험 재정 절감이라는 선순환 구조가 완성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보건·의료 빅데이터를 본격적으로 활용하면 만성 질환 예방과 맞춤형 치료 등을 통해 5년간 최소 8690억원, 최대 2조650억원의 의료비 절감 효과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우리나라는 전 국민 건강보험 덕분에 보건·의료 빅데이터가 잘 구축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환자로부터 나오는 자료는 크게 공공 데이터와 민간 데이터로 나뉜다. 공공 데이터는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의료기관의 보험 청구 자료를 기반으로 파악하는 진료 내역·건강검진 결과·투약 내용 등 광범위하다.

민간 데이터는 의료기관이 전자의무기록(EMR), 환자 등록 자료 형태로 보관 중인 것으로, 활용도는 높지만 의료기관끼리 연계가 안 된다. 우리나라 EMR 도입률은 92%로 세계 최고 수준이나 의료기관 간 정보 호환이 9%에 불과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재료는 좋은데 활용에선 왜 뒤처지나= 현행 보건의료기술진흥법은 한국보건의료연구원에 한해 공익적 연구에 필요한 정보 수집을 위해 공공기관(국공립의료기관)의 자료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전체 의료기관의 93%를 차지하는 민간 의료기관과는 애초에 자료 연계가 불가능하다. 보건·의료 빅데이터 활용 효과와 개인정보 보호라는 두 개의 가치가 충돌하는 것이다.

현재 개인정보보호법과 생명 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에서는 개인정보를 수집할 때 동의를 받도록 하고 있다. 업계가 개인정보 관련 규제부터 풀어달라고 요구하는 이유다. 보건·의료 개인정보는 특히 건강 정보, 유전 정보 등 민감한 내용이 다수라 관련 법규뿐만 아니라 윤리ㆍ사회적 우려까지 넘어야 한다.

최인순 한국보건의료연구원 연구위원은 "민간 대형 병원도 연구 수요가 있지만 현행법상 공공 자료를 쓰지 못한다"며 "전문가·시민단체 등이 모인 위원회에서 공익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할 때는 민간에서도 공공 자료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빅데이터의 '질'에 대한 정부와 업계의 시각차도 크다. 심평원은 2015년 공공기관 최초로 전 국민 진료 정보 및 의료 자원 정보 등을 비식별화한 '보건의료빅데이터개방시스템'을 구축하고 공공 데이터를 개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유전자 빅데이터 분석업계 관계자는 "인공지능(AI) 딥 러닝을 하려면 유전체 정보, 환경 정보, 의료 정보의 3박자가 맞아야 한다"며 "유전체 정보와 환경 정보의 결과물인 심평원의 의료 정보만으로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반박했다.

◆어디까지 허용할지가 문제= 정부도 보건·의료 빅데이터 공개 필요성에는 공감하는 만큼 이제 관건은 어느 선까지 문호를 열 것이냐다.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공익적 목적'에 한해 빅데이터 활용의 문을 열어놓겠다는 입장이다. 보건복지부가 보건ㆍ의료 빅데이터 활용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추진 중인 '보건의료빅데이터특별법'도 마찬가지다. 공익적 목적, 정책 개선을 위한 목적의 연구에 한해 허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업계가 요구하는 상업적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

오상윤 의료정보정책과장은 "보건·의료 정보는 대단히 민감한 정보인 데다 개인정보 유출, 영리적 악용·남용이 우려되는 만큼 산업적 활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며 "시민단체, 학계, 연구계 등이 모인 자문위원회를 통해 내용, 방식 등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에 대해 지난해 복지부의 보건·의료 빅데이터 활용 추진단에 참여한 업체 관계자는 "민자도로를 막아두고 공공도로를 우선 건설하겠다는 셈"이라며 "빅데이터 활용의 파급 효과가 늦어지면 세계와의 격차는 심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박혜정 기자 parky@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