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미래다]'간신' 유자광도 할 말이 있다

조선시대 '서얼차대법'의 피해자…타고난 능력 계발형

유자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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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강구귀 기자] 간신(奸臣)도 할 말이 있다. 시대가 낳은 비극이라면 더 그렇다. 조선의 3대 간신에 늘 빠지지 않는 유자광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어머니가 정실부인이 아닌 서얼 출신으로, 출세를 위해선 공신 외 방법이 없었다. 태종 때 만들어진 '서얼차대법'에 따라 벼슬자리가 원천적으로 차단됐다. 서얼은 아버지가 영의정이라고 해도 벼슬길이 제한됐고, 문과 과거시험은 볼 자격조차 없었다. 무과나 잡과에만 응시가 가능했다.

결국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고, 역모를 고변하고, 역성혁명 주축 세력이 돼 혁명을 성공시키는 등 공신이 되는 길이 유일한 출세의 방법이다. 공신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보니 간신의 오명을 쓰기 마련이다.유자광의 시작은 경복궁 문지기였다. 출신에 따라 관직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자원 출전해 공로를 인정받았고, 이 과정에서 여진족을 평정한 병조판서(요즘의 국방부장관) 남이 장군과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남이 장군을 역모로 몰아죽였다. 이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사림파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면서 간신의 대명사가 됐다. 폭군 연산군의 편에 섰던 그지만 노선을 재빠르게 바꾸기도 했다. 중종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조선 중후기 유림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국을 농단했다는 이유로 그를 간신의 교과서로 삼았다. 1908년이 되서야 삭탈됐던 그의 관작이 회복됐다. 그러나 이는 친일파 이완용의 건의로 이토 히로부미에 의한 것이다. 그런 덕에 현대까지 명예가 실추돼 간신의 대표주자로 남았다.하지만 그가 조선 사회 제도의 피해자라는 지적도 나온다. 서얼 출신인 그가 주류 사회로 올라서는 길은 공신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심승구 한국체육대학교 교수는 "간신은 시대가 만드는 것"이라며 "사림의 정치이념은 유자광을 도덕적 죄인으로 낙인 찍어 역사의 감옥에 수감시킨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양반 사회에서 학살극과 달리 천민과 서민의 고통을 살펴주고 고충을 줄이려 한 것은 그의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정신분열증에 걸린 연산군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궁중하녀들이 거대한 음식상 들기가 힘겨워 하니 큰 상을 두개로 나누어 올리자'고 건의했다. 왕의 품위로 규정된 수라상을 두 개로 나누자는 이야기는 연산군 품위를 낮추자는 말이나 다름 없다. 그럼에도 유자광은 수라상을 올리는 하인을 위해 직언을 한 죄로 문초를 받았다.

유몽인이 쓴 '어유야담'이라는 야사는 그가 조선시대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뛰어난 능력을 꾸준히 계발해 자기 꿈을 마음껏 펼친 건강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또 남원 출신인 그에 대해 남원지역과 호남일부에서는 남원의 정기를 타고 태어난 민중적 영웅으로 보기도 한다.

조선 사회를 지탱했던 신분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학연'이나 '지연' 등을 고리로 한 '순혈주의'가 적지 않게 잔존해 있다. 서얼이였던 유자광 만큼 현대의 흙수저들에게는 고단한 사회다.



강구귀 기자 nin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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