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적 이유 고려되지 않아, 안전이 최우선"
핀란드 온칼로 사용후핵연료 최종처분시설 모습. 10m 간격으로 설치된 구멍에 핵폐기물이 밀봉된 캐니스터가 밀봉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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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라요키(핀란드)ㆍ그림젤(스위스)=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화장실 없는 고급 맨션. 처분시설 없이 방사성 폐기물(사용후핵연료)을 쌓아두고 있는 원자력발전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나라 최초 원전인 부산 고리 1호기가 상업운전을 시작한지 어느덧 40년이 가까워오고 있지만, 아직 고준위 방폐물을 처분할 영구시설은커녕, 부지 조사조차 착수하지 못했다. 2019년부터 각 원전의 임시저장소가 포화되기 시작하는 점을 감안할 때 '발등에 떨어진 불'인 셈이다.
반면 원전 선진국들은 한 발 앞선 행보를 보이고 있다. 특히 원전 건설과 함께 방폐물 처분 연구를 시작한 스위스와 세계 최초로 영구처분시설 착공에 돌입한 핀란드는 우리에게 하나의 교과서나 다름없다. 스위스의 고준위방폐물 처분 연구시설인 GTS에서 만난 잉고 블래슈미트 박사는 "(처분장이 가동되는)2060~2065년쯤이면 사용후핵연료 연구를 시작한 지 100년 정도가 된다"며 "부지선정에 있어 지질학적 정보 등 안전성이 가장 중요하고, 정치사회적 이유는 고려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정치권과 이익단체, 지역주민 간 갈등으로 무려 9차례나 부지물색에 실패했던 우리나라에 시사 하는 바가 큰 대목이다.
핀란드 에우라유키시에 위치한 올킬로오또 원전 및 방폐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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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20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북서쪽으로 240km 떨어진 에우라요키시(市) 올킬루오또섬에 도착하자, 호수를 뒤로 한 채 늘어서 있는 자작나무숲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마치 관광 휴양지나 청정자연림을 찾은듯한 첫 느낌은 이곳에 세계 최초 고준위 방폐장이 건설 중이란 사실을 새삼 잊게 했다. 1983년부터 사용후핵연료 최종처분을 준비해 온 핀란드는 약 17년간 지질조사, 의견수렴 등을 거쳐 이 곳 올킬루오또를 영구처분 부지로 확정했다. 지난해 건설 승인에 따라, 현재 지하 450m 암반에 건설된 온칼로(ONKALO) 연구시설은 2023년부터 영구처분시설로 확장 전환돼 가동에 들어간다.
안내를 맡은 낌모 레흐또씨는 "심층조사 결과 4개 지역이 적합한 것으로 나왔지만, 올킬루오또가 최종 선정된 것은 주민 59%가 (방폐장 건설에) 찬성했기 때문"이라며 "현 세대가 폐기물에 대한 책임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지역 위원회 소속인 사쿠 바하산타넨씨는 "이 지역에서는 원자력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있어 반대 의견은 눈에 띄지 않는다"며 "앞서 원전 시설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지역에 상당한 부와 일자리가 창출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핀란드 국민들 대다수가 방폐장 건설에 동의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정부의 원전 정책 자체에 대한 뿌리 깊은 신뢰에 기인한다. 원전 4기를 운영하는 소규모 원전 운영국가이지만 원전 설립 전부터 장기적 안목을 갖고 방폐물 처분에 대해서도 논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찍 원전을 가동한 미국, 영국보다 앞선 행보로, 부지 선정에서부터 건설 허가까지 전 과정은 국민들에게 공개됐다. 또 지역 주민들은 언제든 온칼로에 방문해 전문가와 함께 원전 현황과 처분과정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선별조사와 지자체 주민의견 수렴을 거쳐 국회 승인을 받는 부지 선정절차는 우리 정부가 지난 7월 최초로 발표한 로드맵(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과 유사하지만, 무엇보다 국민 수용성에서 큰 차이가 보인다. 지역주민인 미까 라빨라(54)씨는 "언제든 물어볼 수 있게 안전에 대한 모든 정보가 공개돼있어 신뢰할 수 있다"며 "직접 온칼로에 다녀온 적도 있다"고 말했다. 유하나(여ㆍ30)씨 역시 "정부가 (원전 및 방폐장이) 안전하다고 하는 말을 믿는다"고 답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기점으로 '탈 원자력정책'을 추진해온 스위스 역시 '원자력이 필요하다'는 국민 대다수의 인식 하에 원전 전면 폐쇄가 아닌 단계적 폐쇄를 통한 에너지 시스템 개편을 진행 중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100만년 후에도 안전할 수 있는 방폐물 처리 부지를 찾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첫 원전 가동 3년 후인 1972년부터 방사성폐기물관리 공동조합인 나그라(NAGRA)를 출범, 관련 연구에 나선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나그라는 현재 노르드오스트와 주라 오스트 등 두 곳을 방폐장 후보지로 압축한 상태다. 2020년 께 부지선정과 국민투표 등을 거쳐 2060년 이후엔 가동에 돌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 방사성 폐기물 처분 연구시설인 그림젤 GTS에서 잉고 블레슈미트 박사가 사용 후 핵연료 보관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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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선정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지역 주민들의 인식이다. 2010년 당시 나그라가 20곳으로 후보지역을 추려 주민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무작정 반대하고 보상을 요구 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을 함께 제시하는 열린 토론에 나섰다. 나그라 소속인 블래슈미트 박사는 "해당 부지에 숲이 있다 등의 이유로 반대하면서도 대신 이 땅은 어떠냐며 대안을 내는 재밌는 모습"이라며 "방폐장의 필요성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모든 국민이 원전에너지의 혜택을 받고 있으므로, 제대로 (방폐물을) 처리하는 것이 국가적 책임이고 의무"라고 꼬집었다.
방폐장 건설 시 기타 재정적 지원을 보상처럼 여기는 우리나라와 달리, 인센티브는 주요사안이 아니었다. 이미 착공에 돌입한 핀란드 에우라요키시에는 원전 시설에 대한 부동산세, 아이스하키장 건설, 관리사업자인 포시바(POSIVA) 본사 이전 등 기본적인 인센티브만 주어졌다. 유하나씨는 "위험성이 있는데 돈으로 해결하는 자체가 이상한 콘셉트"라고 고개를 저었다. 핵 폐기물에 대한 국민적 책임이 있다는 설명이다.
우리나라가 사용후핵연료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것은 핀란드와 비슷한 1983년께부터다. 하지만 방폐물 부지 물색에 9차례 실패했고, 2004년에서야 중저준위와 고준위를 분리해 추진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특히 이익집단 간 정치적 갈등, 수차례 번복된 정부 정책은 국민 신뢰도를 끌어내리는 요인이 됐다. 향후 고준위 방폐장 부지 선정과정에서 발생할 사회적 갈등은 앞서 경주 중저준위 방폐장 선정 당시를 훨씬 웃돌 것으로 우려된다.
스페인의 경우 고준위폐기물 임시저장시설 부지(ATC) 지역을 확정하고도 현재 중앙정부와 주정부 간 소송으로 1년 이상 건설이 지연되고 있다. 마리아노 몰리나 엔레사(enresa, 방사성폐기물관리공사) 국제홍보담당자는 "스페인은 중앙정부 프로젝트에 대한 신뢰가 매우 약한 게 약점이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핀란드의 경우 정부에 대한 높은 신뢰도가 빠르게 (처분)시설을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고 평가했다.
국민수용성과 정책 신뢰도를 확보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채희봉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자원실장은 "(로드맵 상)부지 선정시기를 2028년으로 정한 것도 국민 수용성 제고와 안전성 검토를 위해 충분한 시간을 두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이달 고준위방폐물 처리ㆍ보관 시설 마련을 위한 관리절차법을 국회에 제출하고, 이번 정기국회 내 처리되도록 역량을 집중할 계획이다. 이재학 한국원자력환경공단 사용후핵연료사업추진팀장은 "원전 가동기간이 긴만큼, 이미 발생한 고준위 방폐물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것이 당면현안"이라며 "법이 선행적으로 (제정)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에우라요키(핀란드)ㆍ그림젤(스위스)=조슬기나 기자 se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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