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초등 교과서 한자병기 비판
[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신기루라는 게 아무 근거도 없는 허상은 아니거든요.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본디 것보다 너무나 부풀려져 보이는 왜곡 현상인 거죠. 표의문자인 한자를 둘러싼 지금의 정부 교육정책은 '한자 만능'이라는 신기루를 쫓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52)는 15일 그의 신간 저서 '한자 신기루(피어나)'에 담긴 의미를 이같이 설명했다. 이 대표는 찬반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 병기 정책을 공공언어의 기능과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조목조목 비판했다. 한자 병기 정책은 2018학년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교과서에 한글과 한자를 병기하겠다는 내용으로, 국한문 혼용을 통해 단어의 뜻을 보다 쉽게 전달하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초등 교과서의 내용은 한글만으로도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며 "한자 병기는 초등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가중시키고 사교육 시장의 활성화만 부추길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의 한자 활성화 정책에 힘을 실어준 관련 오해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한자를 많이 알면 공부를 잘 한다' '우리말의 70% 이상은 한자어다' '한글세대는 실질 문맹률이 높다' 등이 그 예로, 그는 "위의 사례 모두 한자의 쓰임새와 효능을 과장하고 있는 '괴담'에 가깝다"고 일축했다.
그 근거로는 대부분의 한글 동형어(同型語)가 문장의 맥락상 뜻 구별이 쉽게 가능하다는 점을 들었다. 이 대표는 "안중근 의사(義士)와 산부인과 의사(醫師)가 말로나 표기상으로나 똑같은 '의사'로 표현된다고 해서 그 뜻을 혼동할 사람은 없다"면서 "이는 한 문장 안에서 뜻이 연결되는 단어들이 무리지어 다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일반적인 대화 상황에서 단어의 뜻을 맥락을 통해 이해하는 것처럼 한글로 표기된 문장이 오역될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공공기관의 정책 언어나 학술용어, 기술 분야의 전문용어도 더 쉬운 말로 고쳐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표음, 표의문자 상관없이 말로 구별할 수 있는 건 글로도 가능하다"며 "한글 창제 때 세종대왕이 그랬듯, 글이라는 건 언문일치를 핵심가치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자를 알고 모르는 것에 따라 국민들 간에 정보 습득의 차별이 생겨서는 안 되며 대중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공공언어일수록 쉽고 바른말이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영국의 '플레인 잉글리시 캠페인(Plain English Campaign)'이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적극 추진한 '플레인 라이팅 액트(Plain Writing Act)'처럼 우리 정부도 공문서 쉽게 쓰기 운동 등의 소통에 중점을 둔 언어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그는 "프랑스에서는 정부 총리실 산하에 신조어 및 전문용어 전문실을 두고 새로운 언어들을 프랑스어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며 "이처럼 국민의 생활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칠 경제ㆍ학술ㆍ정보기술(IT) 분야 전문용어에 대해서는 정부 차원의 관리가 특히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기업 역시 마케팅 차원에서 활용하는 외래어들을 더 쉬운 말로 바꾸면 관련 민원이 줄어드는 등 비용감소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는 국민의 언어생활이 한 나라의 정치적 성장이나 경제성장에 있어 근본적인 힘이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는 "쉬운 언어 정책은 국민의 알 권리를 증진시키고 소통을 원활하게 해 궁극적으로는 사회계층 간 격차와 갈등을 해소시킨다"고 말을 맺었다.
장인서 기자 en130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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