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백수가 새해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새해가 밝았습니다. 대통령님은 새로운 기분으로 한 해를 맞이하셨는지요? 저는 뭐 짐작하시겠지만, 썩 새롭지는 못합니다. 청년 백수 4년차이니, 부모님 뵐 낯도 없고 내가 이렇게 무가치한 인간인가 하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군요. 언제부턴가 부모님도 제게 말을 걸지 않으시고, 제 등 뒤에서 한숨만 푹푹 쉬시더군요. 집안에 이런 백수가 하나만 있어도, 무거운 공기가 내내 떠나지 않는다는 걸 아시는지요. 이런 집안에서 인터넷을 뒤지면서 채용공고를 찾아다니는 제 마음이 어떨 것 같습니까. 마음이 답답하여 대통령님께 하소연도 할 겸 해서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저는 공부를 특별히 게을리 한 것도 아니고, 세상에 나가 일할 수 없을 만큼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응시자는 많고 채용 인원은 턱없이 적은, 그런 좁은 문 앞에서 한없는 무능력자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단지 불황이나 고령화 따위의 불가피한 문제가 낳은 것이라고만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이런 와중에도 취업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을 못 뚫는 자네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고 말씀하시고 싶으십니까. 좋아하는 문과를 지원했다는 점이 죄일까요?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어른들은 다 어디 가셨습니까?제가 쓸데 없는 소리를 늘어놨군요. 대통령님도 연초에 고민하셔야할 일들이 많으실텐데...저도 대통령님처럼 일복이 많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청와대에선 이번 정부의 경제정책 성과를 발표하면서 '창업과 청년 일자리 창출'을 자랑거리로 내세우더군요. 그런데 왜 저는 아직도 이렇게 백수 노릇을 면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성과를 자랑하기에 앞서, 그 '정책들'이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해 울고 있을 많은 청년들을 생각해보셨는지요? 대통령님이 강조하시는 창조경제를 저도 하고 싶습니다. 우선 일자리부터 창조하셔야 제가 지닌 역량과 아이디어와 열정을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뉴스를 보니 올 새해를 맞아, 청와대는 지난 3년간 역대 어느 정부도 하지 못한 '경제민주화의 실천'을 이뤄냈다고 자평했습니다. 경제민주화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사회 시스템이 최소한의 기회균등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나라가, 무엇을 해냈다는 것입니까. 취업문이 갈수록 좁아지고 일자리가 갈수록 불안해지는데, 무엇이 민주화되었다는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최근 발표된 통계를 보면 지난해 11월 취업자 증가 수는 석 달 만에 다시 20만 명대로 주저앉았다고 합니다. 특히 청년 실업률은 8.1%로 넉 달 만에 가장 높았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갓 취업을 한 20~30대 청년들에게 명퇴를 권고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청년들의 고용 환경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데 대통령께서는 상황을 긍정적으로만 보고 계신 것 아닌가 의구심도 갖게 됩니다. 혹시 노동개혁 5대 법안이 청년일자리 창출에 기여하실 거라고 말씀하고 싶으신지요? 이 법안들은 특별연장근로 8시간 허용, 실업수급자격기준 강화, 단계적 출퇴근 산재보상, 35세 이상 비정규직 2년 후 2년 더 연장, 파견업무 허용 확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야당이나 일부 근로자들은 기업들 편에 선 '개악'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지 알 수 없군요.대통령님도 '수저계급론'이라는 말을 들어보셨겠지요? 어차피 금 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 따로 있고 흙 수저 따로 있으니 아무리 노력해도 살림살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이 얘길 듣고 혹시, 요즘 젊은 친구들이 너무 나약하고 부모 핑계만 댄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는지요? 과연 그럴까요?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마치 거대한 벽 앞에 서있는 듯한 느낌. 그게 요즘 젊은이들의 마음입니다. 정말 부모의 지원 없이 그 벽을 뚫는 일은 불가능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절망'을 읽어주셔야, '수저의 한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 태어난 것 자체가 불행의 시작이었다는 주장, 그게 '헬조선'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의 의미입니다. 혀를 차기 전에, 무능을 탓하거나 무기력을 책망하기 전에, 한번 더 청년들의 마음으로 감정이입해보시면 안되겠습니까.
새해 벽두부터 말이 길어졌습니다. 대통령님이 아니면 누가 이런 사회시스템과 경제생태계를 해결해주겠습니까? 금수저, 은수저를 탓하지 않을테니, 청와대에서 많은 청년들의 수저를 챙겨주십시오. '청수저'로 밥 좀 먹고 살고 싶습니다.
<이 기사는 청년실업, 노동개혁 등의 이슈에 대해 온라인에 올라온 네티즌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청년백수가 새해에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면 어떤 내용일지를 가상해 작성한 것입니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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