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되는 /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하네 / 하찮은 것들의 피비린내여 /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이여 평화여 / 밥알을 흘리곤/밥알을 하나씩 줍듯이 / 먼지를 흘리곤 /먼지를 하나씩 줍듯이 / 핏방울 하나 하나 / 그대의 들에선 / 조심히 주워야 하네 / 파리처럼 죽는 자에게 영광 있기를! / 민들레처럼 시드는 자에게 평화 있기를! / 그리고 중얼거려야 하네 / 사랑에 가득 차서/ 그들의 들에 울려야 하네 /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 모래야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 바람아, 먼지야, 풀아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라고 / 세계의 몸부림들은 얼마나 얼마나 작으냐, 라고
-강은교의 '그대의 들'강은교의 이 시는 '김수영키드'가 내놓은 반역적 성찰이다(김수영은 1921년생이고 강은교는 1945년생이니 24년 선배가 된다). 이 시는 정확하게 김수영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에 대한 반격을 가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 화법은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을 따른다.
김수영이 하찮은 일에 분개하고, 거대한 것들에 대해 항거하지 못하는 소시민적인 일상을 비판하는 그 지점에서, 강은교는 하찮은 일에 분개하지 않으면 큰 것에도 분개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놓는다. 김수영의 시절엔 하찮은 일에 성질 내는 것만 반성하면 됐지만, 권력적 폭압과 정치적인 감시를 겪으면서부터는 아예 하찮은 일에도 분노하지 않는 '불감증 인간'이 돼있는 현실과 대면한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살아낸 시인의 내면으로, 김수영의 문제의식이 업데이트된 셈이다.
강은교의 시가 마음을 흔드는 지점은, 하찮은 것들로 치부돼온 존재를 의미있게 바라보는 그 눈길이다. 세상이 하찮은 것과 하찮지 않은 것으로 양분되는 투박함에서 벗어나, 하찮은 것 또한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찮지 않다는, 하찮음의 재발견이 이 시를 동요시킨다. 하찮은 것은 밥알이며 먼지이며 핏방울이다. 하찮은 것이 죽어도 피비린내는 난다. 파리나 민들레처럼 말이다. 김수영이 외쳤던 소시민적인 무기력감의 핵심을 '나'로 읽어낸 강은교는, 교열기자가 기사에서 가차없이 오자를 잡아내듯, '나'를 '우리'로 바꾼다. 하찮음이 파편화되고 개별화됐을 때, 그건 정말 하찮게 주저앉을 수밖에 없지만, 연대하고 소통하고 논의하고 규합하면 하찮음이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몸부림이라는, 시대적인 신탁(神託)을 강은교는 힘주어 새겨놓았다. 하찮음이 어때서? 하찮은 우리들이 거대한 것들을 넘어뜨리는 거대한 뿌리가 아니냐고, 등 돌린 김수영을 흔들며 묻고 있는 것이다. 골수에 박힌 선배의 문법으로 당면한 상처를 날렵하게 읽어낸 은교가 예쁘지 않은가, 수영이 형.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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