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 강자로 떠오른 중국·아베노믹스의 엔저에 힘입은 일본, 국내기업 인수에 열올려
텐센트 등 중국 자본, 상반기 9600억원 넘어…일본 오릭스, STX에너지·현대로지스틱스 인수[아시아경제 조강욱 기자]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수많은 국내 기업들이 쓰러지는 가운데서도 탄탄한 성장세를 이어갔던 글로벌 기업들의 생존 방식은 바로 인수합병(M&A)을 통한 사업 영토 확장이었다. 그들은 동종업계 경쟁사에 대한 적대적 인수를 시도하거나 선두권 기업끼리 합병을 하는 등 덩치 키우기에 주력했다. 경제 위기가 그들에게는 오히려 기회로 작용했던 셈이다. 위기에 처한 한국 기업들이 그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최근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면서 국내 산업 곳곳에서 비슷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불황이 길어지면서 시장에 매물로 나온 기업들도 늘은 데다, 이참에 낮은 가격에 몸집을 불리려는 기업들의 수요도 뒤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국내 기업들에 대한 인수합병 공세가 거세다. 자본시장의 초강자로 떠오른 중국은 막대한 차이나 머니를 바탕으로 전방위적인 국내 기업 인수에 나서고 있고, 일본도 아베노믹스를 바탕으로 한 엔저에 힘입어 한국 기업 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다.
글로벌 인수합병(M&A) 전문기관인 머저마켓에 따르면 중국 자본의 한국 기업 투자는 올 상반기에만 96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2008년(120억원)보다 80배 늘어났다. 그 선봉에는 이른바 'BAT'로 불리는 바이두(Baidu), 알리바바(Alibaba), 텐센트(Tencent) 등 중국 인터넷 기업 3인방을 비롯해 금융, 에너지, 소비재 관련 산업들이 있다. 지난 3월 텐센트가 국내 게임사 CJ게임즈에 5300억원을 투자하기로 한데 이어 한국 최장수 유야복 브랜드 아가방은 중국 의류업체 랑즈(朗姿)그룹에 인수됐다. 여기에 중국 푸싱(復星)그룹이 현대증권 인수전에 도전장을 내는 등 관심을 보이고 있고 반도체업체 동부하이텍 인수전에는 세계 4위 비메모리 위탁생산업체 중국 SMIC가 뛰어든 바 있다. 매물로 나와 있는 한국 기업에 중국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 금융그룹 오릭스는 이미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의 큰 손으로 자리 잡았다. 2002년 대한생명(현 한화생명) 지분 투자를 시작으로 STX메탈(현 STX중공업), STX에너지 등을 인수한 후 매각해 수 천억원의 차익을 남겼다. 또 최근에는 현대그룹으로부터 국내 2위 물류업체인 현대로지스틱스 경영권을 인수했으며 현대증권과 KT렌탈 인수에도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이미 오릭스가 한국에 투자한 금액만 2조3000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의 분위기는 정반대다. '빅딜'을 찾아보기 어렵고 조직 단순화를 위한 계열사간 합병, 혹은 구조조정을 위한 계열사 매각만 줄을 잇는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내놓은 '기업결합동향'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내기업들이 주도한 인수합병은 12조4000억 원 규모로 지난해 상반기보다 5조2000억 원 늘었다. 하지만 계열사간 기업결합은 79건으로 지난해 상반기(71건)보다 늘어난 반면 비(非)계열사와의 인수합병은 150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52건)보다 소폭 줄었다. 이는 계열사간 구조조정을 위한 계열사간 인수합병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업들은 경기전망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라는 이유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이러다가는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에서 뒤처질 가능성이 높다. 설상가상으로 국내 첨단 기술 기업들이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제2의 쌍용차'와 같은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실제 2004년 쌍용차를 인수했던 중국 상하이차는 인수 당시 약속한 투자계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쌍용차의 기술만 빼내갔다는 '먹튀' 논란을 일으켰다.
현재 '제2의 쌍용차'가 될 가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은 팬택이다. 오는 21일 예정된 팬택 인수전 참여기업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ZTE, 화웨이 등 중국업체들의 참여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정부와 채권단, 이통사들이 모두 등을 돌린 상황에서 팬택의 미래가 쌍용차와 닮아가고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상황이다.
김창배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산업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기업 인수합병(M&A)이 절실한데 현재는 우리 기업이 외국기업들의 먹잇감이 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기술 유출을 막는 것은 물론, 원천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인수합병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를 위해 정부 정책과 금융 지원은 물론, 기업의 적극적인 노력 등 3박자가 맞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조강욱 기자 jomarok@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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