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용준 기자]
매서운 겨울바람이 태백산맥을 넘나들며 눈꽃을 만든다. 거대한 바람개비(풍력발전기)가 윙~윙 바람을 품에 안는다. 눈꽃을 이고선 하늘은 손가락만 대도 푸른 물감을 함박 쏟아낼 것 같다. 설국으로 들어섰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상쾌하게 귓전을 때린다. 가지마다 하얀 옷으로 치장한 나무들이 경쟁하 듯 아름다움을 뽐낸다. 서쪽하늘이 달아오르자 붉은 태양이 백색의 속살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진다.강원도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발령됐다. 마침 횡성 태기산(1261m) 산행에 나서기로 한 날이다.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짐을 꾸려 길을 나섰다. 영동고속도로 둔내IC를 나와 양두구미재로 향하는길 내내 차는 서행모드다. 등짝을 타고 땀줄기도 한웅큼씩 흘러내린다.
횡성에는 산이 여럿이지만 장쾌한 풍경과 겨울산의 호젓함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태기산이 첫손가락에 꼽힌다. 태기산은 강원도 횡성군 청일면, 둔내면과 평창군 봉평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해발이 무려 1,261미터로 횡성군에서 가장 높다. 하지만 정상으로 가는 방법이 수월해 겨울에도 태백산맥의 장엄한 풍광을 접할 수 있는게 장점이다. 적설량도 풍부해 설경이 아름답다. 특히 해가 떠오를 무렵이나 일몰에 맞춰 오르면 더 짜릿한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산행 들머리는 여러 가지가 있다. 크게 봉평 쪽 양두구미재에서 오르는 방법과 두구미재에서 오르는 방법, 혹은 태기산 서쪽의 횡성군 청일면 신대리에서 오르는 길 등이 있다.
겨울철 가장 안전한 코스는 양두구미재에서 정상아래까지 임도만 따라가는 길이다. 4km 남짓한 길은 1시간30분 정도면 족하다. 넓은 임도길이라 아이젠만 갖추면 가족들끼리 걷기에도 좋다. 물론 눈이 많이 쏟아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번엔 양두구미재에서 시작해 산을 넘어 횡성 쪽 신대리 송덕사(작은성골)로 하산하는 11.7㎞(4시간 30분 가량)길이다.
양두구미재는 6번 국도상에 있는 해발 980m의 고개다. 이곳은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엔 강릉으로 가는 유일한 국도였다 한다. 지금은 산이나 스키장으로 향하는 이들이 이용하는 한적한 도로가 돼 있다.
양두구미재 정상 올레KT태기산중계소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산행에 나섰다. 신나게 내리던 눈이 어느순간 사라졌다. 구름이 걷히자 하늘은 온통 파란물감을 풀어놓은듯 청명하다.
30분쯤 오르막길을 걸어오르면 1142m봉이다. 이곳은 조망이 좋기로 유명하다. 태백산맥 줄기들이 멀리 구불구불 어깨를 겯고 있다. 계속해서 임도를 따라 길을 재촉한다. 차가 드나드는 길이니 산길로 치면 대로나 다름없다. 그 위에 밀가루처럼 고운 눈이 쌓여 있다. 첫눈 위로 첫 발자국을 찍는다. 한발 두발 옮길때마다 길을 낸 자국이 선명하다.
주변은 눈물 나게 희다. 곧게 뻗은 낙엽송과 잣나무도 줄기 가지 할 것 없이 온통 하얗다. 이곳엔 특히 풍력 발전소가 위치해 있어, 산 능선 위로 솟아 돌아가는 거대한 바람개비도 볼거리다.
정상으로 향할수록 바람이 거세다. 왜 태기산에 풍력 발전기가 많이 설치되어 있는지 알만하다. 눈보라를 일으키며 부는 바람이 얼굴을 들수 없을 정도로 매섭다.
도로를 따라 '태기산 정상'이라고 쓰인 곳까지 올랐다. 태기산 정상엔 군부대가 있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그 바로 아래까지밖에 갈 수 없다. 그곳에서 다시 오른쪽 길로 더 올라 태기산 풍력발전단지 입구까지 갔다.
정상에는 쌓인 눈은 발목까지 푹푹 빠진다. 그래도 하늘 가까이에 이르자 지상의 복닥거림과 소음은 일거에 지워졌다. 적막 속에 새하얀 눈꽃만이 깨질듯 만개해 있었다.
상고대다. 절경 중에 절경을 만난 것이다. 하얗게 얼어붙은 눈꽃이 꽤 단단해 보였다. 정상에서 만나는 광활한 설경과 꽃답게 피어난 눈꽃은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다. 햇빛을 받은 상고대와 소복한 눈밭이 반짝였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력발전기의 모습과 산과 들판의 풍경은 한마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만큼 장쾌하다. 낮은 구름이 넘나들면서 보여주는 운해쇼는 산들이 섬처럼 보여 신비감도 자아낸다.
이제 하산을 해야한다. 하산은 포장된 임도길이 아니라 좁은 등산로다. 본격적인 눈길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올라온 도로를 따라 되돌아 내려가 표지판을 찾는다. '정상'과 '하산'으로 나뉜 나무 표지판이다. 표지판 밑동이 눈에 폭 파묻혀 있어 찾기가 힘들다. 이곳 갈림길에서 하산길로 방향을 틀어 드디어 진짜 '산속'으로 들어선다.
태기산이라는 이름은 삼한시대 말기 진한의 마지막 임금인 태기왕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신라군에게 쫓긴 태기왕이 이곳에서 산성을 쌓고 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지금도 태기산 자락인 성골 골짜기에는 허물어진 성벽과 집터 등이 곳곳에 남아 있다.
발밑에서 뽀득거리던 임도의 눈길과 달리 이제 무릎까지 빠진다. 바닥엔 허리 높이의 산죽이 잔뜩 깔려 있다. 그게 산죽인줄은 눈 밖으로 보이는 가지의 일부로 추측할 따름이다. 어느 곳이 길이고 어느 곳이 숲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이곳이 등산로가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그저 적당히 나무줄기가 적어보이는 곳을 헤집어 밟는다. 같은 산속이지만 이곳은 더 적막했다.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산새소리만 화음처럼 정적을 가른다.
태기산성비를 지나 산성의 흔적을 따라 하산길을 서두른다. 혹시 길을 잘못 들어서 낭떠러지나 길 아닌 잡목 줄기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몰려오기도 한다.
몇 번을 미끄러지다 작은성골로 나왔다. 그제서야 온몸을 감싸고 있던 긴장이 한 순간에 풀린다.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는 여유도 부려본다. 그 순간 걷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차가운 겨울바람이 피부에 닿는 감촉도 얼마나 상쾌한지, 또 맑은 자연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횡성=글 사진=조용준 기자 jun21@
◇여행메모
▲가는길=영동고속도로 둔내 IC로 빠져 둔내면 소재지를 지나 6번 국도에 들어선다. 봉평 방향으로 가다보면 양두구미재 정상 안내간판과 KT중계탑이 보인다. 정상은 세 갈래 길인데 왼쪽으로 난 임도를 따라 오르면 된다. 여기서 정상 아래까지 임도를 따라서만 갔다 오는 산행은 1시간 30분가량걸린다. 양두구미재에서 신대리코스를 이용하면 신대리는 버스종점이 있어 비교적 교통편을 이용하기 좋다. 횡성 쪽 신대리에서 시작해 제자리로 돌아오는 원점회귀형 코스도 있다. 신대리-송덕사-갈림길-태기산성-태기분교터-낙수대-갈림길-큰성골-송덕사(4시간30분 소요).
▲볼거리=힐링명소로 자리잡은 숲체원을 비롯해 자작나무미술관, 청태산자연휴양림, 풍세원성당, 강원참숯, 안흥찐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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