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 크로니클①] 시체 찾으러 명동 뒤진 기자 말하길…

미로처럼 복잡한 골목들, 문을 걸어잠그면 안에서 무슨일이 생겨도 모르는 이웃집…. '공포'의 근원이 '무지'와 '단절'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도시는 괴담이 '창궐'하기 딱 좋은 장소다. 아시아경제에서는 여름 특집으로 지난 100년간 도시 곳곳을 떠돌았던 도시괴담의 연대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첫번째 이야기는 괴담을 추적했던 한 기자의 취재후기다.
일제 강점기 경성 거리 풍경(사진제공=고 이종학씨)

일제 강점기 경성 거리 풍경(사진제공=고 이종학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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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괴담은 일제 강점기에도 골목 구석구석을 유령처럼 떠돌았다. 92년전인 1920년 7월 동아일보는 신문의 한 페이지 하단을 몽땅 털어 '정말인가? 거짓말인가? 기괴한 다옥정 처녀의 시(屍·시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경성 시내에 20일전부터 나도는 소문이 있는데 내용이 너무나 허황하고 기괴하다는 것. 이 괴담은 상사병에 얽힌 이야기란 점에서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나오는 '이생규장전'과 비슷한 느낌이다.

소문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다옥정(현재의 서울 중구 다동) 부근에 사는 한 재산가에게 18살 먹은 무남독녀가 있었는데 한 남학생을 사랑하고 있었다. 처녀는 부모의 허락을 얻어 남학생과 결혼하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고 그 사이 남학생의 마음은 점점 멀어져 갔다.결국 한두달 만나지 못한 동안 남학생은 다른 여자에게 장가를 가고 말았고 처녀는 실연의 아픔에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죽음을 맞이했다. 한데 기이한 일은 여기서부터다.

처녀를 장사 지내려고 수의를 지어 그녀의 방에 들어가려 했으나 도무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몇 사람이 돌아가며 문을 열어도 열리지 않던 문은 그녀의 부친이 슬그머니 밀자 비로소 열렸다. 염하는 사람이 그 즉시 방으로 들어갔으나 시체가 꿈쩍도 하지 않아 도무지 수의를 입힐 수 없었다.

그날 밤 어머니의 꿈속에 죽은 딸이 나타나서 공연히 무정한 사랑을 홀로 믿다가 외로이 죽어버리는 게 차마 애석해 땅속에 들어갈 수가 없다며 규원(閨怨,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을 받은 여자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한다. 이튿날부터 처녀의 부모는 누구든지 신랑이 와서 자신의 딸을 사흘밤만 데리고 자면 추수 후에 삼백석을 떼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처녀의 시체는 한여름 더운 날씨에 20일이 지나도록 부패하지 않았다고 한다.여기까지가 괴소문의 전말이다. 이 소식을 들은 신문 기자가 직접 진상을 취재하러 나섰다. 기자는 오늘날의 명동 일대 장교동, 다동 근처를 샅샅이 훑고 다니나 소문의 진원지를 찾는데 실패했다. 다만 근처 반찬가게 주인과 인력거꾼들에게 처녀 집이 어딘지 묻는 청년들이 찾아온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기자는 이후에도 경찰서장의 도움을 얻어 다동 일대 가택을 일일이 찾아다녔으나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했다. 결국 기자는 장문의 기사끝에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님이 확실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다소 허무한 결말이다.

이외에도 같은 해 여름 부산에는 밤 사이 밥그릇에 알수없는 글씨가 새겨진다는 괴담이 떠돌았다. 마치 그릇에 원래 있었던 것처럼 한자 열 십(十)자 모양, 혹은 알파벳 X자 모양의 글씨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 괴현상은 여러집에서 경험했다는 소문이 돌아 역시 기사화됐다.

1910년에는 핼리혜성이 지구와 충돌해 세계가 멸망한다는 괴담이 우리나라에 전역에 퍼졌다. 10여년 후인 1921년에도 '폰스-비네케(Pons-Winnecke)' 혜성이 지구와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영국 외신을 타고 전해지며 전국을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당시 신문은 "간혹 이런 말을 내어 세상을 소요케 하는 것은 도리어 우스운 일이다. 천문학자도 저승에 가면 아마 극락세계 연화대는 어려울 모양이야"라고 괴담을 퍼뜨린 자를 비난했다.

한편 당시 라디오 방송에서는 괴담을 다룬 드라마가 방송되기도 했다. 지금으로 치면 황금 드라마 시간대인 오후 8시 50분쯤에 '화묘(怪談 化猫)' 같은 이야기들이 전파를 탔다. '화묘'는 일본의 전통 괴담으로, 고양이(바케 네코)가 인간으로 변신해 사람들을 이간질하거나 해친다는 이야기다. 어두운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괴담을 들으며 그 시절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짐작할 만하다.



박충훈 기자 parkjo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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