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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골목길] 피맛골, '빈대떡 신사' 달래주던 대폿집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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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입은 신사가 요리집 문앞에서 매를 맞는데
왜 맞을까 왜 맞을까 원인은 한가지 돈이 없어(중략)
돈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먹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문화의 거리와 연결된 피맛골 주점거리./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서울 종로구 인사동 문화의 거리와 연결된 피맛골 주점거리./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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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1943년 가수 한복남이 부른 유명 가요, '빈대떡 신사'는 사실 노래 가사 한 대목이 바뀌었다는데요. 원래 발표 당시에는 '돈없으면 '대폿집에서' 빈대떡이나 부쳐먹지'였답니다. 빈대떡을 부쳐먹던 그 대폿집들이 소리없이 사라지고 빈대떡은 집에서 부쳐먹는 음식으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사가 바뀐 것이죠. 이 노랫말 속 그 대폿집들은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요? 지금은 수많은 고층빌딩들 사이에 파묻혀버린 조선의 옛 골목, '피맛골'이 대표적 장소입니다.

(일러스트=아시아경제 오성수화백)

(일러스트=아시아경제 오성수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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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관대작 행차 피한 하급관리 '하이패스' 피맛길서 유래=피맛골, 지금은 참 생소한 단어가 됐습니다만 지난 2008년 시작된 '종로 르네상스' 개발에 떠밀려 자취를 감추기 전까진 무려 600년 한양의 역사와 함께 했던 번화가 중 하나였습니다. 피맛골의 유래는 '피마(避馬)'라는 단어에서 나왔는데요. 여기서 피마란 원래 상관의 행차 시에 자신의 말머리를 돌려세우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는 양반 관료들간의 예법을 뜻합니다. 피맛골은 원래 이 피마를 할 필요없이 그냥 내달릴 수 있는 길이란 뜻에서 출발했죠.
피맛골의 위치를 보면, 광화문에서 남대문까지 죽 이어진 세종로에서 한발짝 물러선 위치에 있습니다. 동양의 전 근대시대 도시들은 유교의 경서 중 하나인 '주례(周禮)'에 입각해 주로 도시계획을 세웠는데, 지금의 세종로는 조선시대 한양의 중심도로로 정북쪽을 상징하는 정궁인 경복궁과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을 연결하는 '주작대로' 역할을 했죠. 이 대로는 주로 남들에게 피마할 필요가 없는 고관대작들이 지나 다녔습니다.

옛 피맛골 골목이 사라진 뒤 건축된 서울 종로구 르메이르 종로타운에 자리한 피맛골 상점거리./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옛 피맛골 골목이 사라진 뒤 건축된 서울 종로구 르메이르 종로타운에 자리한 피맛골 상점거리./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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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나 고관대작의 행차에는 사극에서 많이 볼 수 있듯 으레 "휘이 물럿거라. ○○대감 행차시다!" 라며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거덜꾼들이 있었고, 이 거덜 행렬과 만나면 아랫계급 사람들은 피마 예법에 맞춰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했죠. 그러다보니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관리들은 이 거덜 행렬과 만날 때마다 말에서 내려야 해서 지각하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업무상 차질이 심해지자 결국 조정에서 하급관리들이 바로 내달릴 수 있는 길을 만들었고, 이 길 이름이 피맛길이 된 것이죠. 지금으로 따지면 '하이패스'인 셈입니다.

종로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에는 피맛골이 종로 북측의 상피맛길과 남쪽의 하피맛길로 나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피맛골 근처에는 조정의 허가를 받아 운영되는 시장인 '육의전'이 위치해 있었고, 각종 관광서들도 함께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이 근교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린다해서 운종가(雲從街)라 불리기도 했죠. 각종 상인들과 짐꾼과 같은 당시 하층민부터 하급관리들, 고관들, 심지어 임금도 민심을 살피기 위해 자주 미복을 하고 오고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드니 자연스럽게 음식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났고, 피맛골 주점들이 파는 빈대떡과 막걸리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고 하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근처 조선의 궁중과 관청들이 철거되고 사라지면서 피맛골은 더 많은 선술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1930년대 중반에 이미 200개 이상의 선술집이 들어섰다는 조선총독부 기록도 남아있다고 하네요. 해방 이후에도 피맛골은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정겨운 골목길로 남아있었습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문화의 거리와 연결된 피맛골 주점거리./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서울 종로구 인사동 문화의 거리와 연결된 피맛골 주점거리./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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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정비로 자취 감춘 피맛골, 개발과 보존의 이정표 남겨=이곳의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은 2008년부터였습니다. 당시 서울시는 이 피맛골이 포함된 종로구 청진동 일대에 대한 정비계획안을 통과시키면서 피맛골의 시련이 시작됐죠. 2008년 당시 서울시 입장에서 피맛골은 '낡은 건물이 아직 남아있는', 그리고 당시 서울시의 개발 모토였던 '종로 르네상스'를 위해 반드시 멸균처리돼야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피맛골의 역사는 모두 빌딩속으로 들아가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볼거리, 먹거리의 공간으로 다시 조성된다는 계획하에 상가가 대부분 철거됐습니다.

600년간 누적돼온 이 골목의 역사는 이렇게 급격한 재개발과 함께 지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피맛골은 오늘날과 같이 '정비'됐죠. 지금의 르메이에르 센터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린 현대적 '피맛골'과 인사동 문화거리와 연결돼 흔적만 남은 '서피맛골'로 갈라지게 됐습니다. 르메이에르 센터 건물의 피맛골은 쇼핑몰에 있는 푸드코트처럼 정갈하게 배치돼 있는 상점들로 변했습니다. 전통 골목길 특유의 체취는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게 됐죠. 그나마 남아있던 서피맛골 골목의 상점들도 재개발 열기에 따라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입니다. 빈대떡 신사에 등장하는 돈없으면 갈만한 대폿집은 온데간데 없고, 생선굽는 냄새도 전혀 나지 않죠.

서피맛골에서 조금더 들어가면, '피맛골 주점촌'이라고 쓰인 팻말이 있습니다. 그나마 남았던 피맛골의 마지막 흔적입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보면 곳곳의 상점엔 셔터가 내려져있고, 그 위에는 전기사용계약 해지 고지서들이 나붙어 있습니다. 가게 문을 닫은지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난 것이죠. 인사동 골목과 연결된 곳이라 그런지 주점촌 팻말만 보고 들어온 외국인 관광객들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채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이미 완전히 죽은 골목이 된 셈입니다.

서울 종로구 센트로폴리스에 위치한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 조선시대 피맛골 일대 집터가 공개되고 있다./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서울 종로구 센트로폴리스에 위치한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 조선시대 피맛골 일대 집터가 공개되고 있다./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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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개발 과정에서 골목상권 뿐만 아니라 수많은 조선시대 문화재도 파괴됐다는 비판이 함께 나왔습니다. 이후 역사적 장소들의 개발과 보존이란 두개의 가치를 놓고 논쟁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지역이 되기도 했죠. 최근에는 이런 고민 속에 보존과 개발의 공존에 대해 새로운 이정표가 된 곳도 생겼습니다. 옛 피맛골 일대에 위치한 공평동의 센트로폴리스 빌딩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곳 지하 1층에는 서울 최대 규모의 유적전시관이 생겼죠.

이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조선시대 골목길과 건물들의 형태가 고스란히 전시돼 있습니다. 건축주가 지하1층 부지 전체를 서울시에 기부채납하는 대신 용적률 인센티브를 받으면서 빌딩은 빌딩대로 올라갔고, 그 빌딩 내부로 유적이 들어가게 된 셈이죠. 앞으로 이 피맛골 일대지역은 재개발이 될 때마다 더 많은 한양의 골목들이 지하에서 나올 확률이 크기 때문에 이 새로운 개발방식에 따라 피맛골은 또다시 큰 변화를 겪게 될 것 같습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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