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받아쓰기 공책을 보고/바람과 나무, 아이와 노인,/귀신과 저승사자 모두/한마디씩 하고 간다,/"내가 이렇게 말했나?"/"내 이야기는 이게 아닌데."/"잘못 들었군."//귀가 어두워져서 걱정이다. -'자서(自序)'
동시는 윤제림의 세 번째 글쓰기 방식이다. 윤제림을 동시 쓰는 사람으로 아는 독자는 많지 않다. 그러나 윤제림은 시인의 관을 쓰기 전에 동시로 먼저 문단에 거처를 마련했다. 1987년 봄과 가을에 동시와 시로 각각 등단한 것이다. 한 시대를 수놓은 동화작가 정채봉의 예에서 보듯 뛰어난 산문가는 좋은 시인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좋은 시인이 투명한 영혼의 소유자일 때 아름다운 동시를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위에 인용한 윤제림 시인의 '자서'는 윤준호가 낸 산문집의 서문 '그것들이 말했다'를 시로 쓴 것과 같다. 이번에 동시집 '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를 내면서도 윤제림은 거듭 고백한다.
"귀가 조금 큰 편이라서 그럴까요. 남의 소리를 잘 듣습니다. 잘 들어 주니까, 바위와 나무가 말을 걸어옵니다. 꽃과 구름이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귀신이 와서 수다를 떱니다. 강아지와 고양이가 고민을 늘어놓습니다. … 물론, 잘못 알아들을 때도 많습니다. 꽃 이름을 혼동하기도 하고, 새의 울음을 노래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기억하기도 하고, 중요한 대목을 빼먹기도 합니다. 안과 밖을 곧잘 뒤집고, 머리와 꼬리를 바꿔 놓습니다."
물 구름 나무 의좋게 모여 사는/강마을에선/하늘도 되고 강물도 되고 싶은 산들이/하늘도 되고 강물도 되는 게/보인답니다.//파란 햇살 머금고 파랗게 솟는 봉우리/푸른 강물 마시고 푸르게 흐르는 산자락/휘이휘이 삐이삐이/휘파람 부는 저녁 산.-'물 구름 나무 모여 사는 강마을에선' 중에서
'구름처럼 높아지고 싶은 강물은 나무를 타고 하늘로 오르고, 헤엄치는 강물이 되고픈 까만 먹장구름은 초록 빛깔 아름다운 장대비로 내려와 흐른다. 오랜 시간을 두고 일어나는 자연의 순환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고요하고, 땅에선 하늘로, 하늘에선 땅으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마을.' 윤제림이 쓴 동시 속에는 마음들이 모인 작은 마을이 나온다. 그곳은 "꽃집 미니 트럭은 지금 막 문을 연 약국 앞에서,/퀵 서비스 오토바이는/아이들로 붐비는 문구점 앞에서,/속셈 학원 버스는 길 건너 정류장 시내버스 뒤에서,/암탉 한 마리가 그려진 치킨집 꼬마 자동차는/골목 끝에서//사람 하나씩 조심스럽게 내려놓고/가려던 길을 가거나/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눈 온 날 아침의 등굣길 풍경(아침 배달)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자란 동심은 장차 어른이 되어 윤제림이 쓴 시집 속에서 우리를 맞는다. 예컨대 '한여름 밤의 사랑노래' 같은 작품들이다. 여기에도 마을이 있고 동심이 있고, 사무치는 사랑이, 그리고 지극한 삶이 있다.
산장여관 입구에도 매표소 광장에도/학소대에도 선녀탕에도/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은 별이 떴다.//막차마저 놓쳤는지 이십 리 길을 그냥 걸어들어온/가난한 연인들과 민박집 주인 여자의/숙박비 흥정이 길어지고 있을 뿐/산속 피서지의 밤은 대체로 평화롭다.//제아무리 잘 된 영화래봤자/별 다섯 개가 고작인데,/우리들 머리위엔/벌써 수천의 별들이 떴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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