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여성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이야기 '당갈'
'아들이 하나뿐인 사람은 행운아가 아니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성차별 심한 나라 인도
주변의 따가운 시선 이겨내며 두 딸 금메달리스트로 키워낸 아버지
인간으로서의 여성에 주목하기 시작한 인도영화의 새로운 흐름 이어
마당에서 서성이는 마하비르 싱 포갓(아미르 칸). 시험 성적을 기다리는 학생처럼 초조하다. 이윽고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 "딸이야." 포갓은 낙담한다. 아들을 원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못 이룬 레슬링 금메달리스트의 꿈을 아들을 통해 이루고 싶었다. "내 아들이 우리나라에 금메달을 안겨주면 인도의 깃발이 가장 높이 올라갈 거야."
인도에는 '한쪽 눈을 가진 사람이 행운아가 아니듯이 아들이 하나뿐인 사람도 행운아는 아니다'라는 속담이 있다. 아들은 산스크리트어로 '푸트라'라고 부른다. 지옥에서 구해주는 사람이다. 아들이 없으면 부모의 장례식을 치를 사람이 없다는 뜻에서 유래됐다. 차별 속에 살아가는 여성은 아들을 낳아야 대접을 받는다. 시어머니 앞에서 베일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위상이 수직 상승한다. 이 때문에 적잖은 이들은 법을 어기면서까지 태아의 성별을 감별한다.
포갓은 마을사람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좋아하는 레슬링 경기를 마다할 만큼 삶의 의욕을 잃는다. 딸들을 끔찍이 사랑하지만 자신의 꿈을 대신할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딸들이 가능성을 보여준다. 남학생 두 명을 흠씬 두들겨 패고 의기양양한 승리의 미소를 짓는다. "쟤들이 시작했어요. 저 보고 얼간이, 바비타에게 못난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본때를 보여줬죠." 포갓이 어떻게 이겼느냐고 묻자 딸들은 흥분한다. "걔를 잡고 이렇게 주먹을 날렸죠." "그러자 다른 애가 공격했어요. 그 애 머리칼을 잡고 쳐 박았죠. 그러곤 팔꿈치로 등을 쳤어요." 니테쉬 티와리 감독은 이 장면을 느린 화면으로 보여준다. 포갓이 레슬링의 재능을 엿보기 때문만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가 크지 않다는 걸 깨닫는데 초점을 맞춘다.
포갓은 딸들에게 레슬링을 가르친다. 쉼 없이 반복되는 훈련은 가장의 권위를 이용해 레슬링을 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절반 이상 유머로 덧칠돼 있다.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하는 모습에 재밌는 노래를 삽입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운은 고장나버린 자동차 같아요. 아빠는 그 차의 드라이버고요. 오, 아빠. 아빠는 우리 건강에 해로워요." 포갓과 그의 딸들은 동네의 웃음거리가 된다. 아내도 훈련을 만류한다. 하지만 딸과 또래인 수니타의 결혼식에서 상황은 역전된다. "강제로 딸을 레슬러로 만드는 아빠가 세상에 어디 있어? 오전 5시에 일어나 뛰게 만들고, 노예처럼 다루고. 남자애들과 싸우게 만들잖아." "난 신이 그런 아버지를 줬으면 좋겠어. 적어도 너희 아버지는 너희를 생각하잖아. 우리 현실은 여자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요리와 청소를 가르치고 허드레 가사 일을 하게 되잖아."
힌두교는 여자 아이를 일찍 결혼시켜야 부모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성서에 '딸이 12세가 될 때까지 시집을 보내지 않은 부모는 그녀의 달거리(생리 혈)를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가 담겨 있을 정도다. 실제 이유는 여자아이가 성의 주체성을 행사하다가 원치 않는 사생아라도 낳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힌두 성서들은 나이 어린 여자를 이상적인 신부 감으로 추천하기도 한다. 마누 법전은 서른두 살 난 남자와 열두 살 난 여자의 결혼을 칭송한다. 대서사시 '마하바라타'도 서른 살 남자와 열 살 여자, 스물한 살 남자와 일곱 살 여자의 결혼을 권장한다. 딸의 나이가 꽉꽉 들어도 짝을 찾아주지 못하는 아버지들은 밤잠을 설친다. 신랑의 값은 뛰고 결혼지참금은 늘어만 간다.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가난한 집 딸들은 나이 든 홀아비의 노리개가 되기 십상이다.
시타는 인도에서 이상적인 여성으로 자주 꼽힌다. 마하바라타의 주인공이자 힌두교의 주요 신 라마의 아내로, 여필종부의 전형이다. 그녀는 남편 라마가 귀양을 가자 호화로운 궁전생활을 버리고 따라 나선다. 어느 날 악마의 화신 라바나에게 납치돼 스리랑카로 끌려간다. 결국 무사히 돌아오지만 라바나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았는지 남편의 의심을 받고, '백설 같은 과거'를 증명하는 모욕을 당한다. 나중에는 남편에게 버림을 받지만 묵묵히 견딘다.
인도 영화들은 1960년대까지 시타 같은 등장인물을 자주 그렸다. 전통에 순응하려는 여성을 선하게 묘사하고, 새로운 유행을 뒤쫓는 여성을 악인으로 다뤘다. 미나 꾸마리는 '숙박', '파리니타', '외길', '샤르다' 등에서 고통을 받는 여성을 연기해 발리우드 최고의 여배우가 됐다. 1970년대에는 전통적인 여성을 상징한 헤마 말리니와 서구적 인상을 가진 지나뜨 아만의 라이벌 구도가 흥미를 끌었다. 하지만 여성을 남성의 성적 욕구 상대, 출산 도구 정도로 여기는 기본 틀은 바뀌지 않았다. '내 이름은 쟈니', '사랑 사랑 사랑', '히라 파나' 등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들어서야 능동적인 인간으로서 여성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영화 '의미(1982년)'가 전환점을 제공했다. 주인공이 포악한 남편과 보호자를 자처하며 구애하는 남자를 떠나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선다. 여성을 남성 파트너와 대등한 위치에 배치한 건 1990년대부터다. 헌신적인 어머니와 아내, 연인의 모습보다 현실의 여성문제를 조명하기 시작했다. 2003년 개봉한 '육체'는 미모를 이용해 청년을 유혹하고 나이든 남편을 죽이는 여인이 주인공이다. 사회적 규범을 어기고 원초적 욕망을 채우는 자유부인을 그린 '살인'과 과거를 감추고 새 삶을 개척하는 전직 바걸을 조명한 '찬디니 바'도 인도 여성이 풀어야 할 고민에 주목한다.
당갈은 이 흐름을 잇는 작품이다. 티와리 감독은 여성이 주체적 존재로 거듭나는 배경에 주목한다. 기타(파티마 사나 셰이크)는 충분한 레슬링 실력을 보이고도 마땅한 지원을 받지 못한다.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직장을 포기하고 손수 매트를 만드는 등 훈련에 열을 올린 덕에 운동을 멈추지 않는다. 끝내 전국 챔피언에 올라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금의환향에 마을은 축제 분위기로 들썩인다. 그런데 행렬에는 남성들만 있다. 여성들은 멀찌감치 물러나 조용히 부녀를 쳐다본다. 춤을 추며 흥겨워하는 남성들과 대조적이다. 기타의 우승이 여성사회에 어떤 반향도 일으키지 못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어지는 포갓의 당부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나의 꿈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어. 전국 챔피언은 매년 볼 수 있어. 내 꿈이 이뤄지는 건 기타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도를 위해 금메달을 딸 때야." 단순히 애국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다. 전국에 생중계되는 커먼웰스(영연방국가) 게임에서 정상에 올라야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내포한다. 슬럼프와 부상이 도사리는 가시밭길이지만, 도전해볼 가치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인도는 여전히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다. 다른 생물학적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는 가늘어서 들릴까 말까 한다. 하지만 지금도 발리우드는 그 가느다란 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열심히 증언한다. 아쉬왈라 라이, 우르밀라 마톤드카르, 카리나 카푸르 등 여성 배우들을 비롯해 여성 감독과 여성 제작자들의 끊임없는 투쟁이다. 기타의 험난한 여정도 다르지 않다. 그의 아버지는 조언한다. "내일 경기의 전략은 한 가지뿐이야. 사람들이 널 기억나게 하는 방식으로 싸우는 거야. 은메달을 따면 사람들은 곧 널 잊게 될 거야. 금메달을 따면 귀감이 되겠지. 그런 귀감은 잊히지 않아." 그녀의 금메달은 인도의 승리가 아니다. 인도가 변화하는 시작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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