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최은희 별세…향년 92세
남북→탈북 영화 같은 삶 살며 전통·현대 한국의 여성미 연기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사랑채에 든 손님이 나간 방. 주인댁 과부인 옥희 엄마는 중절모에 눈이 간다. 살짝 냄새를 맡고 찡그리는 미간 사이로 묘한 웃음이 흐른다. 삐딱하게 모자를 쓰더니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교태를 부린다. 정숙하던 어머니의 얼굴은 온데간데없다. 낯선 남자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여인의 욕망이 도드라질 뿐이다. 한복의 유려한 곡선에 감춰지지 않는 현대적인 여성의 육체.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년)'에서 나타나는 배우 최은희씨의 주체할 수 없는 끼다. 많은 작품에서 한국적인 여인상을 그려왔지만 전형적인 인식을 배반하는 에너지가 충만했다. '무영탑(1957년)'에서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구슬아기와 '백사부인(1960년)'에서 오묘한 미소로 남성을 유혹하는 백사. '지옥화(1960년)'에서는 몸에 달라붙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남자를 파멸로 이끈다. 다양한 이미지로 전통성과 현대성이 섞이고 충돌하는 여성성을 제시했다.
한국의 여성미를 잘 표현해온 최은희씨가 16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고인은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은막의 스타로 명성을 떨쳤다. 연극 무대를 누비다가 1947년 '새로운 맹세'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밤의 태양(1948년)', '마음의 고향(1949년)' 등을 찍으며 김지미ㆍ엄앵란과 함께 1950∼1960년대 원조 트로이카로 떠올랐다. 그녀는 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신상옥 감독을 만나 결혼한 뒤 많은 영화에서 호흡을 맞췄다. '꿈(1955년)', 지옥화, '춘희(1959년)', '로맨스 빠빠(1960년)', 백사부인, '성춘향(1961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이다. 글래머이면서도 가냘픈 자태와 수줍은 표정으로 요조숙녀에서 요화, 현모양처에서 여걸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1976년까지 130여 편에 출연하며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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