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의 땅 '新남방'을 가다 <1>베트남上
[하노이(베트남)=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 "이 나라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아이디어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베트남 최대 액셀러레이터 베트남실리콘밸리(VSV)의 린 한 최고경영자(CEO)는 "베트남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활기찬 생태계를 갖춘 곳이 됐다"며 "핀테크(금융+기술) 등 외국계가 진출할 만한 분야가 너무 많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한국계 투자경영컨설팅사 KIMC의 테드 김 대표는 "개인 스타트업 1번지는 호찌민이지만 최근 주목받는 곳은 하노이"라며 "하노이는 대기업과 협력업체, 이들을 지원하는 전문 인력 간 선순환 생태계가 구축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 스타트업의 진출 가능성이 더 크다"고 평가했다.
하노이에 기반을 둔 현지 액셀러레이터 하치(HATCH)가 매년 개최하는 데모 데이에는 1만달러의 지원과 6개월간의 전문가 컨설팅을 목표로 하는 이들이 4000여명씩 몰려들고 있다.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한 최종 발표 기회를 얻기 위한 경쟁률은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다.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호찌민에서 시작해 실리콘밸리에 입성한 영어 발음 교정 스타트업 ELSA, 러시아 벤처의 투자를 끌어낸 현지 대표 검색 엔진 스타트업 꼭꼭(COCCOC)과 같은 '베트남 드림'을 꿈꾸는 이들이다.
하노이로 번지고 있는 스타트업 열기는 협업 공간(Co-Working Space)이라 불리는 공유 오피스의 확산 속도로도 확인된다. 공유 오피스는 임대 보증금 없이 월 10만~15만원에 1인 책상 하나를 배당받고 회의실 등 공용 공간까지 사용할 수 있어 스타트업의 산실로 꼽힌다. 3월 초를 기준으로 하노이 내 공유 오피스는 약 27곳(2만㎡).
숫자로는 호찌민에 못 미치지만 증가세는 훨씬 가파르다. 불과 2014년만 해도 3곳에 불과했던 이 지역 내 공유 오피스는 2020년 70~80개, 15만㎡ 규모로 일곱 배(면적 기준) 이상 확대될 것으로 추산된다. 닷 꾸옥 팜 HATCH 창업자 겸 대표는 "공용 오피스는 잠재적인 투자자, 파트너, 고객들을 만나 아이디어를 교환할 수 있는 강력한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며 "저렴한 비용에 사무실을 확보해야 하는 소규모 업체들에 사업적 이점도 제공한다"고 말했다.
오는 6월에는 하노이 레반루엉 지역에 2000㎡ 규모의 공유 오피스 K허브가 한국계 투자를 받아 오픈할 예정이다. 기존 오피스 대비 65% 절감된 월 120만원이면 6인 규모의 별도 사무실을 확보하고 공용 공간들도 이용할 수 있다. 인근 지역에서는 3000㎡ 규모의 공유 오피스 설립이 가시권에 있다. 현지 공유 오피스 1세대로 꼽히는 김효근 전 이노베이션 허브 하노이 대표는 "더 많은 공유 오피스가 하노이에 몰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스타트업 외에 하노이에 진출하는 중소기업, 이들을 지원하는 전문 서비스업체까지. 말 그대로 하노이에서의 '공유 오피스 전쟁'이 이제 본격화한 셈이다.
◆오바마도 주목한 가능성…韓 진출은 아직 미미= 전문가들은 베트남 창업 생태계에 전 세계의 눈길이 쏠리고 있는 이유로 경제성장률, 젊은 인구 구조, 낮은 창업 비용 등과 이를 기반으로 한 높은 시장 잠재력을 꼽는다. 신선영 베트남 하노이무역관 조사원은 "베트남의 스타트업 붐을 견인하는 또 다른 핵심 요인은 최근 가속화하는 외국 자본 유입"이라며 "공유 오피스와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은 스타트업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린 대표는 "벤처캐피털로부터 지원을 받기 위한 경쟁은 인근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보다 덜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의 베트남 투자는 여전히 삼성, LG 등 대기업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을 뿐 아직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의 진출은 미미하다. 지난 4년간 VSV가 지원한 기업은 총 700곳 상당으로 이 가운데 초기 단계인 시드(Seed) 투자까지 이어진 곳은 52개사지만, 한국계는 단 1곳에 불과했다. 3D 촬영 파일을 통해 가상공간 내 지형지물을 설계하는 투리플(Turiple)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해 4개월간의 VSV 프로그램 참여 후 현지 엔젤펀드로부터 투자를 확정받은 투리플의 조용원 대표는 "처음부터 동남아시아에 맞춰 접근했다"며 "세계 액셀러레이터 커뮤니티 F6S.com이나 구글을 통해 베트남 등 현지 액셀러레이터를 찾은 후 직접 지원했다"고 말했다.
같은 해 베트남 현지 숙박 애플리케이션 1위인 고투조이(Go2Joy)를 출시한 변성민 아프로모바일 대표는 2001년 SK텔레콤 파견 근무로 베트남과 첫 인연을 맺게 돼 정착한 케이스다. 그는 "베트남시장을 분석해보니 상위 100개 서비스 가운데 로컬시장만 노린 서비스가 9개밖에 없었다"며 "한국에서 이미 통한 비즈니스 모델 가운데 베트남 로컬시장에 비어 있는 부분을 찾아내 지난해 서비스를 론칭했다"고 전했다.
◆IT 강점 갖춘 韓기업 진출 유리…"벤처캐피털 투자도 활성화해야"= 현지에서는 향후 한국계 스타트업의 성공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다. 린 대표는 "IT 등을 갖춘 한국 기업이 진출하기에 여러 가지로 유리한 상황"이라며 "수요는 있지만 현지에서 기술 개발이 어려운, 기술을 갖고 진출해야 하는 영역이 주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지원 대상 선정 시 가장 중요한 점으로 창립자의 의도와 의지, 아이디어 등을 꼽았다.
또 다른 액셀러레이터인 HATCH의 이사회 멤버 에런 에버하트는 "한국은 아시아 문화와 자유시장경제, 미국식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며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는 데 이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IT, 핀테크, 문화, 관광 등의 분야가 특히 한국 스타트업의 강점 분야로 꼽힌다. 쇼핑, 의료, 교육 등도 이른바 '비어 있는' 시장이다.
최근 2년간 현지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갓 대학을 졸업한 25~30세 청년층이 대다수이던 창업시장에 10년 이상 근속 경력이 있는 첨단 기업 출신 경력자들이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베트남시장이 청년층보다 오히려 전문 기술과 노하우, 실패 경험을 갖춘 중ㆍ장년 퇴직자에게 새로운 성공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높다. 이른 은퇴와 불안정한 제2노동시장 등이 숙제인 한국 정부로서도 이를 정책적으로 활용,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일본ㆍ싱가포르 등에 황금시장을 뺏기고 있다는 비판도 잇따른다. 최근 국내 금융사의 베트남 내 5성급 호텔 인수를 성사시킨 테드 김 대표는 "베트남의 스타트업시장과 증시는 욱일승천의 성장을 보이고 있지만 이 둘을 연계한 한국 벤처캐피털의 투자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기 어렵다"며 "5만달러, 10만달러 투자도 과감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 왜 이 시장을 다른 아시아 펀드들에 뺏기고 있냐"고 꼬집었다. 변 대표는 "베트남에 법인을 설립한 후 투자를 받는 과정에서 제약이 많았다"며 "베트남 진출 시 한국 법인 모회사가 100% 소유하고 모회사가 엔젤펀드 등 한국계 투자를 끌고 오는 형태가 가장 좋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현지 관계자들은 베트남 진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길게 내다보는 인내심과 시장 이해에 기반한 글로컬라이제이션(세계화와 동시에 현지화를 추구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베트남 투자자문사 VIETBID의 응우옌 탄 하 대표는 "베트남에서는 아직 행정 실무 속도가 제도를 따라가지 못해 예상 기간보다 두 배 이상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며 "계획 단계부터 긴 기간을 둬야 한다"고 말했다. HATCH의 닷 대표는 "제휴 관계에 주력하라"며 "창업은 언제나 위험하지만, 현지 시장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투자는 훨씬 덜 위험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용어 설명◇
-액셀러레이터: 스타트업을 발굴해 초기투자를 진행하고 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경영자문, 인프라, 후속 투자자 유치 등을 도와주는 곳이다. 약 3~6개월에 걸친 지원 프로그램이 끝나면 투자자를 상대로 사업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데모데이 행사를 마련해준다.
하노이(베트남)=조슬기나 기자 seul@asiae.co.kr
꼭 봐야할 주요뉴스
문어 넣어 먹는 겨울간식…요즘은 '불닭볶음면'과 ... 마스크영역<ⓒ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