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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정이 만난 사람]박혜란 "슈퍼맨 환상이 여혐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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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그 후 1년…'루저'에게 위로 안하는 사회 문제

박혜란 여성학자 (사진=문호남 수습기자)

박혜란 여성학자 (사진=문호남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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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서소정 기자]"슈퍼맨·슈퍼우먼을 원하는 사회가 여혐(여성 혐오)을 만들었어요."

17일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1주년을 맞은 가운데 33년간 여성학자 길을 걸어온 박혜란 ㈔여성문화네트워크 대표는 안타까운 듯 말을 이어갔다. "여성에게 일과 육아를 완벽히 해야 한다는 슈퍼우먼 환상이 있듯, 여성들도 남성들에게 슈퍼맨을 요구한다"는 그는 이런 시각이 여혐을 발생하게 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여성들이 가사를 잘 도와주고 인물이 잘 생기고 돈도 잘 버는 슈퍼맨을 원하자 소위 '밀리는' 남성들이 원한을 갖게 되는 것"이라면서 '루저(패자)'에게 위로를 안하는 사회 문화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짚었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도깨비'를 예로 근 그는 "도깨비(공유)가 출중한 능력으로 슈퍼맨처럼 (원하는 것) 척척 해주니 여성들이 열광하지 않나"며 그러나 현실에서 슈퍼맨은 쉽지 않다고 웃었다.

그간 성공하는 여성들에게 붙었던 "슈퍼우먼이라는 말 자체도 굉장히 억압적"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그냥 '우먼'으로 살기도 헉헉한 세상에 슈퍼우먼이 어딨냐"며 이런 환상을 버리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최근 심상정 정의당 후보의 공약중 '슈퍼우먼 방지법'이 워킹맘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것도 현실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퍽퍽한지 방증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남녀를 떠나서 루저(패자)라고 규정짓지 말고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존재라는 사회적 인식이 뒷받침돼야 여혐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진정한 목표라는 설명이다.
박 대표는 지난해 일흔을 맞았다. 33년간 페미니스트로 활동하면서 비주류였던 여성학의 저변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가 주목받은 것은 가수 이적(본명 이동준)의 엄마라는 타이틀이 한 몫했다. 아들 셋을 사교육 없이 서울대에 보낸 자신만의 교육론을 담은 '믿는만큼 자라는 아이들'은 1996년 출간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스테디셀러다. 이후 여성학, 육아법 등을 아우르는 12권의 저서를 꾸준히 출간하며 부모들에게 육아멘토로 불리고 있다.

그는 "젊었을 때에는 이적 엄마 여성학자로 불리는 것에 까칠하게 반응했다"며 "여성의 주체성을 주장하는 사람인데 누구의 엄마라고 불리는 한국적인 현실이 씁쓸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자 시각이 바뀌었다. 업적주의가 팽배한 한국사회에서 아들이 서울대에 들어갔고, 자신만의 노래로 대중의 인정을 받으니 그런 호칭이 자연스레 붙게 된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내 육아법이 단지 이론이 아니라 현실적용 가능한 사례임을 입증한 셈"이라면서 아들을 만나면 "지금도 너 팔아서 산다"고 말한다고 웃었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로 '아이들 셋을 낳은 것'과 '여성학 공부' 두가지를 꼽았다. 서울대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다 둘째 출산으로 인해 비자발적 전업주부가 돼 아들 셋을 키웠다. 사교육은 전혀 시키지 않고 아들들과 몸으로 놀아주며 어린시절 자유분방하게 키웠다. 아이들 학창시절에는 학교를 단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집은 언제나 아이들로 북적였단다. 아들 셋을 키우다 보니 아파트 1층에서만 살았고 아이 친구들이 자주 놀러와서 현관문을 항상 열어놓았더니 항공모함 크기의 운동화가 엘레베이터 앞까지 즐비했다고 한다. 공부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창의력의 원천은 독서'라는 생각에 책을 가까이 하도록 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책 제목처럼 믿는만큼 잘 자라주었다.

그런 그에게도 고민이 생겼다. 막내가 초등학교 입학한 후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자아의 위기감이 찾아온 것이다. 이를 계기로 여성학을 공부하게 됐고, 그간 자신의 지식체계나 가치관이 남성중심 사고였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여성임에도 여성성을 폄하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페미니즘의 창을 통해 본 세상은 이전 세상과 완전히 달랐다"는 그는 이후 여성학자로서 제2의 인생을 살게 됐다. 최근 그는 양성평등 문화의 저변을 확대한 공로로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세종문화상을 받았다. 상금 3000만원은 여성단체에 기부했다.

박 대표는 '결혼은 꿈, 육아는 전설이 돼버린 헬조선'의 현실에 대해 "남보란 듯이 애를 키우고 싶다는 것은 다 허상"이라며 '아이에 올인하지 말고 자기만의 삶에 충실하게 살기'를 주문했다. 문재인 정부에는 여성의 문제를 국가 차원이 아닌 여성 삶의 질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접근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출산율 저하는 국가생산성 저하라는 국가 관점이 아닌 '진짜' 여성의 삶의 질이 개선될 수 있도록 진정성을 갖고 정책을 추진해달라"고 덧붙였다.



서소정 기자 ss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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