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결혼행진곡과 멘델스존의 축혼행진곡에 얽힌 이야기
[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살면서 누구나 한번 이상은 하객 또는 주인공으로 들어봤을 결혼행진곡과 축혼행진곡의 작곡가는 19세기에 함께 활동했으되, 원수와도 같은 사이였다. 유대계 상위 1% 집안 출신의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와 반유대주의에 심취했던 리하르트 바그너는 당대에도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지만, 정작 한 쌍의 남녀가 새로운 출발을 선언하는 자리에선 그들의 음악이 각각 처음과 끝을 장식하며 공존하고 있으니, 무덤에 있는 이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당장에라도 뛰쳐나와 서로 먼저 자신의 곡 연주를 즉각 중지시킬 것이다.
바그너는 빚쟁이에 쫒겨 런던을 거쳐 어렵게 당도한 파리 음악계에서 자신의 음악성을 인정받고자 했으나 유대인 음악가를 중심으로 한 기존 프랑스 음악계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독일로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고, 이후 그는 반유대주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글과 음악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원본보기 아이콘히틀러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작곡가, 바그너
바그너가 처음부터 반유대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독일을 떠나 파리에서 음악가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미 살롱문화를 통해 상류문화계를 장악한 유대인 작곡가들의 공고한 벽에 부딪혀 작품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쓸쓸히 귀국길에 올랐고, 이후 유대인에 대한 악감정과 민족주의적 성향은 더욱 강해져 이후 자신의 글을 통해 '유대인은 페스트나 다름없는 놈들'이란 격한 비난까지 쏟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바그너가 세상을 떠나고 독일을 장악한 히틀러는 12살 때 처음 본 바그너의 오페라가 끝난 뒤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을 정도로 그의 작품에 깊이 매료되었고, 그가 가졌던 사상은 더욱 숭배했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발현된 '게르만 신화'는 바그너를 거쳐 히틀러에 이르러 환상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파국으로 치달았고 끝내 역사가 기억하듯 몰락으로 그 끝을 맺었다.
돈, 명예, 사랑, 그리고 재능까지 가진, 멘델스존
멘델스존이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주제로 작곡한 서곡 중 아홉 번째 곡인 축혼행진곡은 트럼펫의 경쾌한 도입부 연주와 함께 잔잔하면서도 기품 있는 분위기를 자아내 결혼식 마지막, 두 남녀의 동행을 장식하는 피날레 곡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멘델스존은 부유한 유대인 은행가 부친과 문학가인 모친 사이에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유년을 보내며 자신의 천재성을 일찍이 발견, 당시 그를 만났던 괴테로부터 "저 아이의 실력에 비하면 모차르트는 어린애가 빽빽거리며 소리 지르는 수준일 뿐"이라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생일 선물로 아버지가 꾸려준 악단을 받아 자신이 악장으로 그들을 지휘했고, 자신의 부유한 환경을 바탕으로 재능은 있으나 궁핍한 환경에 있던 동료 음악가들을 고용하는 선행을 베풀기도 했다.
실제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아들을 유대인보다 독일인으로 키우고 싶어 했다. 멘델스존 본인 또한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 신자였으며 독일 음악계 발전을 위해 잊혀졌거나 거론되지 않던 바흐, 슈베르트의 많은 작품들을 재발굴해 세상에 내놓는 한편 교육에도 힘써 강단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던 중 과로로 인한 뇌출혈로 3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음악을 통해 일가를 이룬 음악가의 성향이 작품 바깥의 원색적인 비난으로 번져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 지점도 흥미롭지만, 이들의 사이를 더욱 멀어져 보이게 한 것은 두 사람 사후 나치를 통해 독일을 장악한 히틀러의 극단적 취향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음악의 힘은 위대했고, 결국 비극으로 끝난 바그너의 로엔그린 곡으로 신부가 입장해 멘델스존의 행복한 곡으로 신랑과 신부가 함께 행진하는 모습은 1858년 영국의 공주 빅토리아의 결혼식 이후 오랫동안 우리 삶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