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고모를 찾습니다'에서 첫 2인극 도전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배우 정영숙(69)하면 목소리가 먼저 떠오른다. 발음은 정확하고, 톤은 우아하다. 아무리 긴 대사도 그가 하면 귀에 쏙쏙 들어왔다. "따로 훈련한 건 없고 그저 대사를 잘 전달하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한 번은 택시를 타자마자 "00동으로 가주세요"하는 한 마디만으로 택시 기사가 단번에 알아봤다고 한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말이 없는 역할을 맡았다. 연극 '고모를 찾습니다'의 주인공 '그레이스'는 임종을 앞두고 묵비권을 행사한다. 연기인생 48년 만에 이렇게 대사가 적은 적이 없었다. 그는 "1972년 드라마 '아다다'에서 백치 아다다 역을 맡은 적이 있지만 이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대사 부담이 없어서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관객 앞에서 몸짓이나 표정 등으로 모든 걸 표현해야 하는 또 다른 부담이 있다"고 했다.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정영숙은 TV 브라운관에서 막 걸어나온 듯 했다. "반갑습니다"하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듣던 대로였고, 단아한 체구와 정갈한 옷차림이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역할을 많이 했지만 유독 부잣집 사모님 이미지가 강한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작 본인은 자신을 '생활인'이라고 소개했다. 집에 가면 종이도 아끼고, 불필요한 전기도 일일이 찾아 끈다. 항상 바쁘게 움직이는 걸 좋아해서 그런지 임신 때를 제외하고는 평생 50kg을 넘어본 적이 없다. "사모님은 커녕,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사는지 다 알걸요"하며 웃었다. 그 모습에서 예전 TV 광고에서 '해ㅇ' 식용유를 들고 서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하는 2인극에 대해 "새로운 도전"이라고 표현했다. '연기의 달인', '베테랑'이란 수식어에는 손사래쳤다. 그는 "자기가 하는 것에 만족하는 연기자가 어디있겠나. 아유, 막, 어떤 때는 내 연기를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보기 민망할 때도 있다. 완벽할 수 없으니까 그냥 최선을 다하는 것 뿐"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줄기차게 TV 드라마를 하다 보니 연극 무대에 설 시간이 없었다. "연극을 하면서 연기에 온 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워낙 다작을 하느라 바빴다"는 그는 "드라마나 영화는 중간에 딴 짓도 할 수 있는데, 연극은 정말 몰입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압감이 상당하다"고 했다.
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1968년 숙명여대 4학년 시절, TBC에서 추천제 탤런트를 뽑았다. 각 학교에 공문이 내려왔는데, 친구들이 너도나도 '나가보라'고 해서 얼떨결에 지원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연기에 '연'자도 모른 채" 무작정 실전에서 부딪히면서 배웠다. 영화 '간난이(1976)'를 찍을 때도 상대 배우 신구(80)와 계속 대사를 맞춰보며 연습을 했던 게 기억난다 했다. "그 때는 TV도 흔하지 않아서 연기를 배우는 게 쉽지 않았다. 근데 요즘 후배들은 또 다르더라. '여심(1986)'이란 드라마에서 김희애가 딸로 출연했는데, 어린 데도 연기를 너무 잘해서 깜짝 놀랐다. 아마 지금 배우하라고 했으면 난 못했을 것 같다."
들어오는 배역에 따라 세월을 실감했다. 30대 후반 무렵, 어느 날 방송국에서 '윤비' 작품을 하자고 했다. 당연히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대본에는 20대 배우 이름이 적혀있었다. 의아하게 생각해서 감독에게 전화했더니 '윤비 엄마' 역할이라고 했다. 그는 "그 때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관둘 때가 됐구나 싶었다"고 했다. 주름때문에 거울보기도 싫었던 때도 있었다. "내가 정영숙이란 이름을 알린 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다, 이렇게 생각을 바꿨다. 그랬더니 후배들도 예쁘게 보이고, 자연스럽게 바뀌는 환경에도 순응하게 됐다. 이제 시청자들도 나를 정으로 봐주시는 것이지 않나."
50여년의 세월 동안 유명인으로 살면서 그 흔한 스캔들 한 번 없었다. "많은 사랑을 받은 만큼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하지만 배우로서의 욕심은 버리지 않았다. "로맨스 그레이를 다룬 드라마 '그대를 사랑합니다(2012)'를 할 때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했다. 너무 행복한 기억이다. 그런 작품이 또 오기를 기다려봐야지. 이제 연기를 남겨둘 시간이 얼마 없다. 좋은 작품이면 덤벼들어야 한다."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사진=백소아 기자 sharp204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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