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음악 디바 임선혜 "어떻게 이렇게 오래 기억해줄까 싶어요"
[아시아경제 임온유 기자] "'나 같은 동양인 소프라노, 유럽 무대에서 1, 2년 뒤엔 잊히겠지' 생각한 게 벌써 20년이 다 돼 가네요. 어떻게 이렇게 오래 기억해줄까 싶어요."
필리프 헤레베허, 헬무트 릴링, 윌리엄 크리스티, 르네 야콥스, 주빈 메타, 정명훈…. 소프라노 임선혜(40)가 거쳐 온 세계적인 지휘 명장들이다. 임선혜는 1999년 헤레베허에게 발탁돼 모차르트의 C단조 미사로 유럽 무대에 데뷔했다. 당시 그는 서울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 칼스루에 국립음대에서 유학 중이었다. 거장 앞에서 '모두 불러본 곡'이라며 순수하게 거짓말하던 스물세 살 임선혜는 17년이 지난 지금 '고음악 디바'의 자리에 우뚝 섰다.
임선혜를 지난 6일 평창대관령음악제가 열린 알펜시아 리조트에서 만났다. 4년 만에 돌아온 음악제에서 그는 베토벤의 C장조 미사, 바흐의 칸타타 '사라져라, 슬픔의 그림자여' 등으로 한국 관객과 다섯 번이나 만났다. 임선혜는 "세계 여느 페스티벌에도 뒤지지 않는 음악제"라며 "연주자는 음악을 너무 잘 파악하고 있고 관객은 그들과 진지하게 교감한다"고 했다.
임선혜는 오는 27일 수원국제음악제에서 '새야새야', '내마음' 등 한국 가곡만으로 독창회를 열 예정이다. 늘 유럽에 머무는 임선혜이기에 이어지는 국내 무대는 그의 목소리를 듣기 원하는 관객에게 매우 귀중한 시간이다.
임선혜 음악의 중심에는 '고음악'이 있다. 고음악이란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파 등 옛음악을 그 시대의 악기와 어법으로 재현해내는 연주다. "시대적으로 풍족해지면서 클래식이 화려함과 웅장함으로 채워졌어요. 그것들을 조금 덜어내고 처음처럼 음악을 즐기자는 움직임이 바로 고음악이죠. 좀 더 순수한 클래식이라고 보면 돼요. 쇠줄이 아닌 양곱창으로 만든 현악기들은 자연에 가까운 소리를 이끌어내죠."
고음악의 중심에 동양인인 임선혜가 있다. 그는 바흐, 헨델, 모차르트를 주요 레퍼토리로 고음악계 거장들과 작업했다. 헤레베허는 임선혜의 목소리를 '금빛'이라고 했다. 그의 스승인 롤란드 헤르만 칼스루에 국립음대 교수는 '금빛의 맑은 음색에 눈물 방울이 맺혔다'고 했다. 임선혜는 "최고의 칭찬"이라면서도 "나는 무대에서 음악을 배워가는 사람이다. 완전하지 않다. 데뷔한 지 17년이 지난 지금도 고음악을 대할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고음악계만 임선혜를 탐내는 게 아니다. 미국 뉴욕 필하모닉, 독일 뮌헨 필하모닉,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같은 대형 오케스트라 역시 그를 찾는다. 10월에도 주빈 메타와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함께 이스라엘 투어에 나선다. 15일 동안 무려 열한 번 공연한다. 한국을 떠나 낯선 곳에서 노래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어디에도 집이 없고 어디에나 집이 있는 방랑자 같은 인생이에요. 자유로움이 제 영감의 원천이죠. 때때로 안정을 찾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 순간 저는 영감을 잃게 되는 거죠. '물 흐르는 대로 살자'고 늘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나이 마흔을 넘기니 고민이 생기네요. '내가 정말 유유자적 떠다니는 게 맞는 걸까? 혹시 떠밀려 다니진 않았나?'"
임선혜의 고민은 최근 좀 더 넓어진 그의 활동 반경에서도 묻어난다. 그는 지난해 5월 뮤지컬 '팬텀'에 '크리스티나' 역으로 출연했다. 지난 5월에는 에릭 사티 탄생 150주년을 기념한 음악드라마 내레이션을 맡기도 했다. 주빈 메타와 좋은 인연을 이어 오페라 '가면 무도회'에서 '오스카' 역으로 출연하고 싶기도 하다. 임선혜는 "지금이 소프라노로서는 전성기"라며 "이 시간이 지나면 아가씨나 신부 역할을 못할 것 같다.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음악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소프라노 이후의 다른 인생을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했다.
"음악은 고맙게도 제 인생과 함께하며 늘 치맛자락을 붙잡아주는 존재예요. 제 삶을 풀어가는 도구이기도 하고요. 음악을 하면서 특별함 가운데 평범하고, 평범함 가운데 특별하게 살고 싶어요. 무대를 위해 하루 종일 방 안에만 있는다든지 혼자 밥을 먹는다든지 그렇게 살았어요. 하지만 음악가라는 이유로 평범한 행복을 너무 많이 놓치고 싶지는 않아요. 무대에서 내려오면 음악가라는 걸 잊고 살래요. 그래야 저도 모르게 제 안에서 좋은 음악이 나올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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