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끔찍한 희생에 대해 국민 모두가 알게 된 지금, 한 화학자의 몇 년 전 글이 다시 회자되고 있습니다. 지금 그 누구보다도 정부와 기업의 무책임함을 비판하고 있는 그는 기실, 정부가 뒤늦게 가습기 살균제의 위험성을 경고했을 무렵 그것이 비과학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 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판매금지는 진행되었고, 따라서 그의 글들이 어떤 현실적인 악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라지만 지금과 당시의 논조를 비교하면 씁쓸해지는 대목이 좀 있습니다.
상상도 하기 힘든 거액의 수임료와 광범위한 로비의혹으로 얼룩진 이른바 전관파동의 한 중심에 선 변호사가 판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문학판사'라고 불리면서 좋은 글을 많이 썼다는 이야기, 특히 '행복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내면의 만족감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내용의 글로 법원으로부터 문예상을 받기도 했다는 소식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그런 글을 믿고 그에게 찾아간 의뢰인들도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마저 듭니다.
문학판 언저리를 배회하던 시절, 존경하던 작가를 만난 다음 글 값에 크게 못 미치는 인품에 놀라고 상처 입은 적이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좋은 글이 반드시 좋은 사람에 의해서만 쓰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분야에 관해 쓴 글은 사회적 파급효과라는 점에서 문학작품과는 구별되는 점이 있습니다. 의사결정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전혀 믿고 싶지 않지만, 가습기 살균제에 관한 연구가 조작되었다는 설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전문가의 타락을 상징하는 엽기적이고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자신도 이런 반성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않습니다. 편견에 사로잡혀 키보드를 누른 일이 없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다시금 되새겨봅니다. 이제 모든 글은 영생을 얻을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쓰는 자는 기억이라는 형벌을 얻게 될 것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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