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책읽기-'제국의 위안부' 샅샅이 읽기(2)
가라유키상과 관련한 숫자들도 등장한다. 1909년의 한 신문에는 싱가포르의 가라유키상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그곳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약 1800명이며 그중에 추업(醜業, 더러운 일)에 종사한 여성은 900명이었다. 그중 300명은 업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본의 아니게 이곳에서 가라유키상이 된 경우라고 한다. 또 1910년에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가는 배에 젊은 여성들이 대거 탑승했는데, 그들은 포주가 시키는는 대로 하도록 맡기겠다는 부모의 수락증서를 품 속에 지니고 있었다. 또 당시의 경성에 머물고 있는 일본인들 중에 '하녀'라는 직업을 가진 일본여성이 961명이었고 기생은 347명이었다고 한다.
이같은 가라유키상에 익숙해져 있던 일본은, 식민지 국가경영에 가라유키상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그 대상을 조선으로 확장해 조선인 위안부를 동원하는 정책으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모리사키는 가라유키상의 확장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가라유키상은 국가의 공창제도에 그대로 흡수된다. 조차지 뿐 아니라 일본의 지배가 닿는 지역이라면 어디든 있었다. 구 만주지역은 물론이고 청국의 북쪽이나 남쪽 주요 도시에서는 가라유키상이 흔했고 이들을 공창과 사창으로 나누어 일본 경찰이 관리했다....북쪽 대륙으로 건너간 가라유키상은 그곳에 일본의 주권이 미치기 시작하자 공창제로 관리되었다. 헌병대는 그녀들의 매독을 검사했다."
조선 위안부 문제를 '일본의 가라유키상'의 연장선에서 봐야할 것인가. 실제로 가라유키상은 '위안부'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인위안부를 가라유키상의 부분집합으로 보거나 유사한 개념으로 읽어내는 순간, 그들이 다른 국가에 대해 저지른 폭력에 대한 책임이 묽어질 수 밖에 없다. 박유하교수가 거론한 이 문제는, 일본 식민지배의 부당성을 지나치게 일본의 관점에서 이해해준 나머지, 현실적인 피해와 고통을 묵과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제국의 위안부> 샅샅이 읽기
1편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6011617332365768
2편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6011619133619323
3편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6011621094988284
4편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6011706451008322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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