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인제로 떠나는 문학기행
[아시아경제 조용준 여행전문기자]바람이 붑니다. 바람을 타고 도는 향기를 느껴봅니다. 달콤한 내음에 온 몸이 쫘르르~ 떨려옵니다. 언제 가을이 왔을까요. 자연의 색이 바뀌고 있습니다. 하루 하루의 변화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어느새 가을은 성큼 다가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가을맞이 여정에 잘 어울리는 게 무엇일까요. 바로 책입니다. 책 한 권 옆구리에 끼고 강원도 인제로 떠나봅니다. 인제는 강원도의 대표적인 '문학성소'입니다. 만해 한용운의 삶과 문학의 흔적이 깃든 곳이고, 모더니즘과 낭만주의 시인 박인환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백화(白樺)의 주인공인 자작나무숲에 들면 가을이 듬뿍 묻어납니다. 그 뿐인가.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의 배경인 귀둔리와 소설가 한수산의 '부초(浮草)'로 상징되는 내린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문학이 바람처럼 흐르는 길을 따라 인제로의 아름다운 여행길에 들었습니다.
인제로 가는 길,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산자락 골골마다 아직 설익은 가을이 가득하지만 빗방울을 머금은 숲은 청량하다. 숲을 스치는 비바람은 자장가를 연주하다 금세 비발디의 사계 여름처럼 소나기를 뿌릴듯한 기세로 기운차다. 자작나무숲으로 든다. 인제 문학여행의 출발점이다. 순백의 알몸을 수줍게 내보이며 눈 부신 빛을 뿜어내는 그런 나무다. '내가 자작나무를 그리워하는 것은 자작나무가 하얗기 때문이고/자작나무가 하얀 것은 자작나무숲에 일하는 사람들이/때 묻지 않은 심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안도현 시인의 '자작나무를 찾아서'가 입속에 맴돈다.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 관광 100선'에 선정된 '원대리 자작나무숲'. 우리나라 자작나무숲 중 최고라 해도 손색이 없다. 숲에 들어가 걷고,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듣고, 만질 수 있는 오감이 통하는 그런 곳이다.
시원하게 쏟아지던 비도 가늘어지며 살짝 숨고르기를 한다. 50여분 오르자 단조롭고 팍팍했던 임도가 넓어지면서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휩싸인다.
길옆에 서서 숲을 내려다본다. 하얀 알몸을 드러낸 수 많은 자작나무가 거대한 숲을 이룬 풍광은 황홀하다.
한 발 내딛는다. 휴대폰이 먹통이 된다. 문명의 세상과 단절되는 이 순간 자작나무숲은 오롯이 나의 것이 된다.
백석시인의 백화가 떠오른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산 너머는 평안도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숲으로 빨려 들어갔다. 단일 수종으로 이뤄진 숲 치고 이렇게 넓게 사람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자작나무숲이 또 있을까 싶다. 그 길을 밟는 느낌은 편안하면서도 이국적이다. 그리고 강렬하다.
가까이서 보는 자작나무는 묘한 매력이 풍긴다. 왜 자작나무가 '숲속의 귀족'으로 불리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귀인의 살결 같은 수피는 하얗다 못해 은빛을 발할만큼 황홀하다. 눈부신 그 모습에 잠시 멍하니 숲을 느껴본다.
편지를 쓰고 싶다. 새하얀 껍질에 사랑을 고백하는 글을…. 자작나무로 편지를 써 보내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낭만적인 속설에 마음이 동한게다.
원대리를 나서 필례약수로 향했다. 이순원이 1996년 발표한 소설 '은비령'의 무대로 가는 길이다. 내설악의 용대리와 한계령 사이, 필례약수터로 빠지는 작은 고갯마루를 소설 속에서 그렇게 불렀다. 작가가 소설화하기 이전에는 '은비령'이란 이름조차 없었다. 지금은 귀둔마을로 들어서는 고개 전체를 은비령으로 부른다.
소설 '은비령'은 우주의 시간과 별의 시간을 견디는 사랑 이야기다. 주인공은 변산반도를 향하던 중 길을 바꾸어 은비령으로 간다. 은비령을 품고 있는 필례계곡에서 수천, 수만 년 전부터 영속해온 별의 세계에 진입한다.
차량 한 두대를 겨우 만나는 길을 따라 산 허리를 돌고 돌아서야 필례약수터에 닿았다.
양철로 만든 물바가지로 목을 축인다. 철분이 많이 녹아 있는 탄산수로 비릿한 맛과 톡 쏘는 맛이 목줄기를 타고 넘는다.
오지였던 탓에 필례계곡 주변은 잘 보존되어 있다. 식당가와 주차장을 제외하고는 울창한 숲과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다.
약수터 위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계곡물소리 벗 삼아 10여분 오르자 새로운 세상이다. 숨소리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점봉산과 가리산의 준봉 아래로 펼쳐진 풍경만이 한 폭의 그림인 듯 시간이 멎는다. '은비령 세상은 멈추어 서고 2500만년보다 더 긴 시간을 은비령에 갇혀 우주 공간의 사랑에 빠진 남녀가 그곳에 있었던 것 같다'는 소설속 이야기처럼ㆍㆍㆍ.
은비령길을 따라 오르면 한계령이다. 길은 한없이 굽어 있다. 자동차들은 허덕이며 조심조심 굽은 길을 오른다. 한계령을 타는 내내 길은 꺾어지고 또 꺾어진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내설악의 초가을을 품는다. 어느새 용대리다. 만해 한용운의 유허(遺墟)가 담긴 백담사와 '만해마을'이 있는 곳이다.
만해는 18세 때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다 실패하고 설악산 오세암에서 출가했다. 그 후 만주 등지를 떠돌다가 다시 백담사로 와 시집 '님의 침묵'을 썼다.
'만해마을'은 한용운의 뜻을 기리고 널리 펴기 위해 조성한 마을이다. '문인의 집', '만해문학박물관', '만해학교', '심우장', '서원보전'(법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해문학박물관을 지나면 범종루다. 범종과 더불어 법고, 목어, 운판이 걸려 있다. 울림으로써 염원에 가 닿는 것들이다. 탐방객들이 당목(撞木)을 움직여 종을 친다. 마을 앞 북천 위로 울림이 길게 날아간다.
용대리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산길을 오르면 백담사다. 절 입구 유심교 아래 드넓은 계곡이 펼쳐진다. 유수에 바위가 씻겨 목탁처럼 반짝인다. 절집을 감싸고 있는 숲은 가을빛을 품었다. 백담사는 신라 때 지어져 모두 일곱 번 불탔으나 새 모습으로 건재하다. 사바세계에서 큰 죄를 짓고 숨어 지낸 전(前) 대통령 탓에 유명세를 치르긴 했으나, 이곳은 만해가 '님의 침묵'을 탈고한 곳이다.
문학여정의 마지막은 '박인환 문학관'. 인제군 상동리에서 태어나 1956년 31세를 일기로 요절한 천재시인의 문학혼을 추억한다.
평소 보았던 작품이나 작가의 전시물을 전시해놓은 다른 문학관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박인환이 명동백작으로 불리며 누볐던 명동거리, 서점, 술집 등을 보고 만져볼 수 있게 드라마 세트장처럼 재현해 놨다.
박인환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가 스무살 무렵 종로에 세운 서점 '마리서사'다. 당시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다. 시인 조병화, 배인철 등도 이곳을 제 집 같이 드나들며 문학과 인생을 이야기했다. 선술집 '유명옥'은 모더니즘 시운동이 시작된 곳으로 통한다.
초가을 햇살이 첩첩산중을 넘고 있다. 넥타이를 휘날리며 서 있는 시인의 동상이 노을빛에 반짝인다. 그의 시 한 자락이 떠오른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부서진다…./(목마와 숙녀).
인제=글 사진 조용준 여행전문기자 jun21@asiae.co.kr
◇여행메모
△가는길=경춘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동홍천IC을 나와 인제방향 46번 국도를 탄다. 38선휴게소 지나 인제읍 못미쳐 남전교를 건너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인제종합장묘센터(하늘내린 도리안)방향으로 간다. 이곳에서 원대리마을 자작나무숲 임도초입까지는 10여분 걸린다. 원대리를 나와 451번 지방도 이용, 현리를 지나 점봉산을 끼고 가면 필례약수터 은비령길이다. 용대리의 만해마을과 백담사는 인제읍에서 미시령 방면에 있고 박인환문학관은 인제읍내에 있다.
△볼거리=점봉산 곰배령은 야생화 천국이다. 곰배령으로 오르는 그 길을 따라 야생화가 지천이다. 원시림보호구역이라 사전예약 필수. 산림청 홈페이지(www.forest.go.kr). 곰배령 아래 설피밭이나 강선마을에 묵은 투숙객들은 확인을 거쳐 오를 수 있다. 인제국유림관리소(033-460-8014). 방태산 자연휴양림의 이단폭포와 방동약수터도 찾아보자. 가을이 깊어지면 백담계곡의 단풍도 빼놓을 수 없다. 이밖에도 내린천에선 번지점프, 짚라인, 래프팅(사진) 등을 즐길 수 있다. 우리나라 근 현대 시집을 전시하는 '한국시집박물관'도 문을 열었다.
△먹거리=자작나무숲에서 가까운 맛집으로는 원대막국수(033-462-1515)를 꼽을만하다. 이름그대로 막국수와 감자전이 맛깔스럽다. 남면의 대흥식당(033-461-2599)은 질경이밥을 내놓는다. 진동계곡길에 있는 '진동산채가(033-463-8484·사진)'은 산채비빔밥과 산채정식을 맛나게 한다. 가리산휴양림 진입로에 있는 한방약초누룽지백숙(033-436-2250)은 안주인의 손맛과 직접 재배해 조리한 밑반찬이 먹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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