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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에서]금도끼, 은도끼, 아니 쇠도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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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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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탁 원고가 밀린 글쟁이에게 '뭘 쓸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 쓸 것인지' 어느 게 더 고민스러울까. 당연히 전자다. 뭘 쓸 건지가 나오면 어떻게든 쓸 테니 말이다. 과학기술 연구개발도 어떻게 잘할지보다 도대체 뭘 할지가 더 중요함은 마찬가지다.

지난 1년간 다른 연구과제를 제쳐 두고 매달려온 일이 있다. 우리 정부의 해외원조 일환으로 동아프리카 어느 저개발국에 카이스트(KAIST)와 같은 고급 과학기술대학을 설립하는 것의 타당성조사 사업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40년 전 경제개발계획을 막 시작하던 시점 한국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 속에서 수많은 실수와 오해와 부주의로 사업 자체가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착각이라 함은 지금 이 저개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나라 60년대랑 비슷하다고 해서 그 시절 우리가 했던 것을 하자고 할 수는 없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이건 조금만 생각해봐도 맞는 말인데도 늘 벤치마킹이라는 이름으로 수원국의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을 들이대는 실수는 의외로 해외공적개발원조(ODA)에서 빚어지는 가장 흔한 오류이다.
카이스트와 같은 자생적인 고급 이공계 교육기관은 사실 저개발국에 상당히 매력적인 모델이다. 똑똑한 인재들을 선진국에 아무리 대거 유학시킨다 해도 첨단 과학기술을 배운 이들이 가난한 고국에 돌아오면 마땅히 일할 곳이 없으니 두뇌 유출의 악순환이 계속될 터다. 만약 중장기 국가발전 전략하에 산업화를 주도할 고급 기술인력을 자체적으로 배출해 내는 고등교육기관이 있다면 과학기술로 경제성장을 견인하고 이에 경제사회적 발전 수준이 높아지면서 더 첨단의 과학기술 연구를 지원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마련될 것이다.

문제는 무엇을 가르치고 연구할 것인가다. 이 타당성조사 사업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은 것이 바로 이 문제였다. 당연히 현실적인 제약으로 이 새로운 대학에 처음부터 모든 학과를 설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위 전략적 중점 연구교육분야를 찾아야 했다. 단순히 생각하면 그 나라가 마침 중장기 발전 비전을 세운 터라 그 비전에 부응할 수 있는 분야를 찾으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갖가지 딜레마가 금방 튀어나왔다. 먼저 비전은 그야말로 구호인지라 그 비전을 담은 전략적 목표는 오리무중이었다. 농업과 관광이 주요 산업인데 여기에 과학기술을 접목해 혁신하면 이 저개발국이 내세운 20년 후 중진국 도약이라는 비전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은 미약한 제조업을 확실히 활성화시킬 것인지. 전자를 택하면 농업기술과 생명과학을 접목하는 것이 좋은 전략이겠고 후자를 택하면 기계공학, 토목공학 등 전통적인 공학 분야가 중점 영역으로 나올 것이다.
근데 전자를 택하든 후자를 택하든 전략적 선택의 과정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제조업이라면 그럼 무슨 제조업부터 시작할 것인가. 피혁, 식품가공 등 이미 잘하는 분야를 더 개량할 것인지 새로운 종목을 개척할 것인지. 이왕 새로운 걸 하는 김에 원자력, 우주개발은 어떤가. 꼭 미국인만 달나라 가라는 법은 없지 않나. 결국 이 딜레마는 현실의 수요와 미래의 니즈 사이에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 같은 딜레마는 비단 이 저개발국의 문제만이 아니다. 혹자는 우리가 정보기술(IT) 강국이니 이 비교우위를 계속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이제는 IT가 아니라 (혹은 IT만이 아니라) 바이오, 나노 등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한다고 한다. 전자의 길을 택해도 IT에 수많은 분야가 있으니 한 단계 내려가면 똑같은 고민이 반복된다. 그럼 어느 분야가 유망한지 과학기술 전문가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겠냐 싶지만 팔이 안으로 굽듯 이들 역시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전문 분야를 옹호하는 편향이 다분하니 전문가들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산신령과 나무꾼으로 친숙한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는 잘 알려졌듯이 정직을 설파하는 동화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전략적 선택에 관한 탁월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나무꾼의 미덕은 산신령이 이런저런 제안을 했음에도 스스로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 명확하게 답할 수 있었던 점이다.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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