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지난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 중 하나인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 최근 이곳 발굴조사에서 '왕궁 부엌'으로 추정되는 터가 발견돼 화제다. 개인 집 부엌터는 여러 차례 확인된바 있지만, 이처럼 고대시기 왕궁의 부엌터로 보이는 유적이 드러난 사례는 처음이어서 주목된다.
지난 20일 왕궁리 유적에선 이번 조사결과를 발표하는 현장 간담회가 열렸다. 왕궁리 유적은 백제 제 30대 무왕대(600~641년)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는 왕궁이다. 무왕은 신라와의 전쟁을 여러 차례 치렀던 왕이었다. 당시 백제 사비기 수도였던 부여가 아닌, 익산에 이 같은 왕궁을 세운 이유에 대해 '대 신라 전쟁'을 위한 전초기지를 만들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익산은 부여보다 남동쪽에 위치해 지리적으로 신라와 더 가까웠다. 백제 말에서 신라 초기엔 사찰로 바뀐 것으로 추정되며, 이를 증명하는 국보 제 289호 익산왕궁리 5층석탑과 금당 등 사찰 건물터가 여럿 남아있다. 왕궁리유적에서 4.8km 떨어진 곳에는 신라 황룡사와 비견되는 미륵사 터가 자리해있다.
◆첫 고대 왕궁 부엌 터 추정 유적 발견…시기별 변화양상 증거 철제솥 출토= 왕궁리유적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1989년부터 올해까지 26년에 걸쳐 연차 발굴 중에 있다. 연구소는 올해 이 유적의 서남편 일대(8300㎡)에 대한 발굴하면서, 백제 사비기 왕궁의 부엌터로 추정되는 동서 6.8m, 남북 11.3m 규모의 건물터가 발견됐다고 했다.
전용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연구사(42)는 "왕궁 역시 사람이 사는 공간이기에 가장 필요한 시설인 부엌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통일신라때까지 왕궁으로 확실한 곳에는 부여 사비도성도 있고, 서울 풍납토성 그리고 현재 첫 발굴을 개시한 경주 월성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부엌의 흔적은 찾아낼 수 없었다"며 "이는 시간이 지나면 유물들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은 고고학적 조사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오래된 유물, 유적의 자연소실로 왕궁리유적의 부엌 터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부엌의 모습이 바닥으로나마 남아있는 것도 흔치 않다"고 했다. 안악3호분 고구려벽화고분을 통해 고대의 부엌을 유추해볼 수 있는데, 여기엔 쌍여닫이로 된 부엌의 출입문, 녹유전이 깔린 바닥, 아궁이와 굴뚝이 달린 부뚜막과 식기보관시설이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중세시기인 고려 왕궁에서는 이 같은 부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전 연구사는 "오랜 기간을 두고 남북공동연구조사로 진행돼 오던 고려수도 개성유적에서 아직 부엌을 확인했다는 얘기는 없다"며 "사실 왕궁리유적 역시 그동안 절터와 정전 등 여러 중심 건물지들을 모두 조사한 후 부엌을 찾아낸 것"이라고 했다.
부엌 터 내 타원형 구덩이에서는 철제솥 2점과 함께 어깨가 넓은 항아리 2점, 목이 짧고 아가리가 곧은 항아리 1점, 목이 짧은 병 2점 등 토기 5점과 숫돌 3점도 나왔다. 바로 옆 바깥에서는 철제솥 1점이 별도로 놓여 있었다. 부엌에서 핵심 조리도구로 여겨지는 철제솥. 이곳에서 발견된 철제솥(무게 10㎏)은 고구려 시대 방어시설로 산성이었던 서울 구의동 유적이나 경주 천마총에서 발굴된 철제솥처럼 바닥에 원형 돌기가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다만 구연 및 동체는 어깨에 넓은 턱이 있으며, 아가리는 안쪽으로 살짝 휘어진 모습으로, 익산 미륵사지, 부여 부소산성 통일신라 건물지, 당진 대운산리 토기가마, 광양 마로산성에서 나온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솥과 닮아있다. 연구사는 "삼국시대 철제솥과 통일신라, 고려 철제솥을 이어줄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이번 부엌 추정 터가 확실하게 부엌인지에 대해서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출토 당시 철제솥이 뒤집혀 있었던 모습 등으로 비춰 제사 유적일 가능성 등 이견이 나왔다.
◆부엌 터 아래 장랑형 건물지…건축기법 일본전파 = 이 부엌 터 아래엔 길이가 약 29.6m, 너비가 약 4.5m인 남북으로 긴 형태의 건물터도 확인됐다. 이와 유사한 구조와 배치 양상은 일본의 나니와노미야(難波宮, 난파궁), 아스카노미야(飛鳥宮, 비조궁) 등에서 나타나고 있어, 백제 궁성 축조형식이 일본에 전파됐음을 유추할 수 있다.
올해 발굴 이전까지 왕궁리유적에서는 그동안 궁장(宮墻, 궁궐을 둘러싼 담장), 대형 전각을 비롯한 각종 전각 터, 금·유리 도가니가 발견된 공방터 등이 확인됐으며 인장 기와, 연화문 수막새 등 중요 유물 1만여 점이 출토돼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익산=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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