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전통·민족을 품었던 월북화가 이쾌대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군상'이란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화가 이쾌대(1913~1965년). '리얼리즘 미술의 거장', '월북 화가'라는 이미지가 강해 그동안 그의 다채로운 작품세계를 살펴보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이쾌대'라는 이름 석 자 조차 거론되는 게 금기시되다 해금된 것이 1988년. 이후 그의 이름과 인생과 작품세계가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월북한 1953년 전까지 남한에서 활동하며 남긴 그림들은 대략 1930년에서 1950년 무렵까지 20여년에 걸쳐 제작된 것들이다. 일제강점기, 해방기, 한국전쟁기로 우리 역사의 비극적 시대와 겹친다. 작가 나이 열일곱 살 때부터 삼십대 시절까지, 이쾌대의 작품이 우리에게 남아있다.
청년 이쾌대가 어떻게 자신의 작품세계를 모색했는지, 그가 쌓아올린 서정적이고 세련된 다양한 예술세계, 민족이 처한 현실을 붓으로 끌어안았던 작가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 대거 모였다. 서울 중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22일 개막한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전이다. 해방 70년이자 20세기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이쾌대가 타계한지 50년 되는 해를 맞아, 유족들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입어 탄탄하게 준비된 전시다. 전시는 그의 대표작과 드로잉, 삽화, 수집 엽서, 편지 등 미공개 아카이브 총 400여점을 소개한다. 특히 전성기 시절 제작한 '군상' 시리즈 4점과 자화상들이 모두 모여 있어 눈길을 끈다.
이쾌대는 '3만석꾼'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토지를 소유한 경북 칠곡의 한 부잣집 막내아들이었다. 그는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야구를 즐기며, 일본 유학을 다녀왔으며 당시의 모던보이들처럼 쾌활한 멋쟁이었고, 아내 유갑봉 여사 역시 세련된 미모를 지닌 신여성에 속했다. 화가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뜨거운 사랑이 싯구와 함께 절절하게 담겨 있다. 스무 살에 결혼해 아내와 함께 일본에서 신혼을 보내며 유학 중 서양화를 배운 이쾌대는 인물화에 관심을 보였다. 당시 아내를 모델로 한 그림을 수없이 그렸고, 아내의 초상화에서 시작된 인물화는 차츰 조선의 여성상으로 변화했다. 그는 일본의 유명 전람회인 ‘니카텐’(二科展, 이과전)에서 '운명'(1938년작)으로 입선하며 두각을 보였는데, '운명'의 경우 한 남자의 주검을 둘러싸고 비탄에 빠진 여성들을 그려져 있다. 같은 해 그려진 '상황'에는 두 손으로 방어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무희, 벌거벗은 여인, 패물을 든 노파 등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여성들과 함께 뒤편에 무심한 표정의 한 남자가 보인다.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40)는 "두 그림 모두 일제강점기 조선 사람들이 겪는 수난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많다"며 "한복을 입은 젊은 여성들은 단단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거나 확고한 의지를 가진 인간상으로 그려져 있다"고 했다.
왼쪽부터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72x60cm, 개인소장)과 '군상4'(1948년 추정, 캔버스에 유채, 177x216cm, 개인소장)
원본보기 아이콘일본에서 돌아온 이쾌대는 이중섭, 문학수, 김종찬, 최재덕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 서양화에 전통회화 기법과 색채를 도입한 '한국적 서양화'를 모색했다. 특히 그림 속 주인공들의 전통 복식의 표현과 색채의 조화에 고심했다. 전통에 대한 관심은 기생·지게꾼·김치 담그는 여인 등 조선 풍속과 더불어 부여·군산· 금강산 등의 명소, 무열왕릉·고구려 고분벽화 등 고대 유적이 담긴 엽서를 수집하고 이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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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후 이쾌대는 새로운 국가의 미술 건설을 위해 의욕적으로 작품제작에 몰두한다. 서울 돈암동에 작업실을 마련해 제자들과 함께 '성북회화연구소'를 차린 것도 이 즈음이다. "사회가 잘 되기 위해서는 예술이 부흥해야 하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미술을 부흥시켜야 문화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했던 스승 이쾌대의 얘기를 서양화가 김창열, 조각가 전뢰진 등 제자들은 기억한다. 그 시절 발표한 작품에는 당당한 시선과 동양화 모필, 평화로운 초가마을이 배경으로 그려진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과 함께 '군상' 연작, '창공', '조난' 등이 있다. 이 중 일부 작품들은 미군이 독도를 폭격한 독도 사건 등 정치적 이슈를 소재로 해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군상' 연작은 해방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실존성이 부각된 벌거벗은 군중들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결연한 의지가 돋보인다.
그러나 이쾌대의 민족미술에 대한 꿈은 멈추고 말았다. 남북대립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한때 좌익계열의 미술단체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사상전향을 강요받았고, 국민보도연맹에 동원돼 반공 포스터를 제작한 적이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병환중인 노모와 만삭이었던 부인 때문에 서울에 머물렀던 그는 북한 지도부의 강요에 의해 다시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이 국군에 탈환됐을 때에는 또다시 북한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수용소 시절 가족이 함께 모일 날만 손꼽았던 그의 바람은 편지글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런데 이쾌대는 1953년 남북한 포로교환 당시 북을 택했다. 그 배경은 여전히 의혹으로 남아있다. 1948년 초 이미 월북을 감행한 독립운동가이자 기자였던 열두 살 위 친형 이여성으로 인해 남한에서의 입지가 불안했을 것이라든지, 수용소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이다. 최열 미술평론가(59)는 "그의 중도노선은 해방 공간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진 못했지만 중간 지대의 운동은 격동하는 시대의 사회를 또 다른 눈길로 아로새겨내는 거점이었고, 그것이 경직된 문화에 다양성과 예술의 역동성을 열어주었다"고 했다. 전시는 오는 11월 1일까지. 02-2022-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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