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의 마지막 유서와도 같은 작품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도 잔인한 기억인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지난 70여년의 세월을 어떻게 보냈을까. 죄책감에 시달렸을까, 아니면 기억을 지우고 전쟁 후의 일상에 집중했을까. 확실한 것은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은 그 떨쳐낼 수 없는 악몽에 시달리면서 오히려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죄책감은 "체제에 대항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나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자괴감에서 오는 것이며, 수치심은 "자신이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고 살아남은 게 아닐까"하는 의심에서 나온 것이다. 가해자는 쉽게 잊고, 피해자는 되려 고통에 시달리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프리모 레비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아우슈비츠'를 기억 혹은 기록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든 행위다. "너희 중 아무도 살아남아 증언하지 못할 것이며, 혹시 누군가 살아 나간다 하더라도 세상이 그를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나치 친위대 군인들의 자신만만한 경고가 현실이 되는 것이야말로 그가 우려한 가장 끔찍한 사태다. 실제로 강제수용소의 모든 문서들은 전쟁 마지막 며칠 동안 모두 불살라져 "희생자들의 수가 400만이었는지, 600만이었는지, 800만이었는지" 오늘날에도 논란만 계속되고 있다.
"라거(강제수용소)에 대한 진실을 확산시키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독일 민족이 저지른 가장 중대한 집단 범죄의 하나이며, 히틀러의 테러로 인해 독일 민족이 다다른 비겁함을 가장 명백하게 증명해주는 것이다. 관습 속으로 들어와버린 비겁함, 너무나 깊어서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식에게도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비겁함이다. 이 비겁함이 없었더라면 그토록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고 유럽과 세상은 오늘날 달라져 있을 것이다."
포로들에게 최대한의 괴로움을 짜내려는 나치의 폭력성, 나보다 더 관대하고 현명하고 쓸모있는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다는 수치심, 진실을 직면하기를 거부하는 세상 등 아우슈비츠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레비를 좌절하고 절망하게 했다. 책 제목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단테의 '신곡'의 지옥 편에서 뽑았다. '가라앉은 자'는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완전한 증인"들을 의미한다. '구조된 자'들은 그들 대신 증언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레비는 결국 "홀로코스트의 가르침이 역사의 일반적인 잔혹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로 그렇게 잊힐 것"이라는 슬픈 예감에 사로잡힌다. 어찔할 수 없는 열패감에 시달린 채 레비는 1987년 4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유서와도 같은 이 작품은 오늘에서야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개가 됐다. 살아남은 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이라는 그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프리모 레비 / 돌베개 / 1만3000원)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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