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80년대와 민주화 운동의 여진 속에 살아온 나에게 일본은 너무나 평화로운 곳이었다. 소음이 없이 고요한 도쿄의 주택가, 상대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심, 당혹스러울 정도의 정치적 무관심과 소시민적인 자기 취향에 대한 집착은 격동기의 한국과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한 번은 민영TV가 역사 교육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시부야를 방문, '고갸루(여고생)'를 취재한 적이 있었다. 기자가 여고생에게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과 일본이 전쟁한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묻자 그 학생은 깜짝 놀라며 "정말이에요? 그런데 누가 이겼나요"라고 되묻는 어처구니 없는 영상이 방영된 적도 있었다. 어쨌든 일본은 격렬한 대립 속의 한국과 다른,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다른 나라였다.
유학 첫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도쿄대 검도부에 가입한 유일한 외국인이었던 나는 법학부 4학년 선배(?)와 식사를 함께하게 되었다. 초 후지오 도요타 회장, 쿠니마쯔 다카지 경찰청 장관 등 유수한 인물을 배출한 검도부였으니 그 자부심은 대단했다. 더구나 도쿄대 법학부는 일본 관료의 중추를 배출하는 최고의 엘리트 양성소였다. 그 법학부 학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미래의 꿈이 무엇인가요" 그 학생이 주저없이 대답했다. "미쯔비시 물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순간 내가 당혹스러웠다. 다시 물었다. "취직이 아니라 당신의 미래에 대한 꿈을 묻는 겁니다." 오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대답했다. "미쯔비시 물산인데요…." 이런 대답은 단지 그 학생 한 사람만의 것은 아니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대학 강단에 섰을 때에는 또 한 번의 당혹스러움을 맛보아야 했다. 수업 중에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해 일본 학생들은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찬반 의사표시를 하라고 해도 대다수는 눈치만 보고 침묵했다.
그로부터 15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한국의 대학에서 당시 일본 학생과 똑같은 모습을 보고 있다. 학생들은 의사표시를 하지 않는다. 찬반을 물어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다. 그래서 개강 첫 시간에는 항상 학생에게 룰을 선언한다. "여러분이 찬반 의사표시를 하지 않으면 의견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싫으면 의견을 명확히 표시하라." 수업이 종강을 향해 갈 즈음이 돼서야 학생들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낙심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의 청년들이 입시경쟁과 취업난 속에서, 기성세대의 압박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창조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의 젊은이들을 들여다 봐야 할 때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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