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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앤비전]사령부를 포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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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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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봄 서른이 넘은 늦은 나이에 일본 유학을 떠나기에는 큰 결심이 필요했다. 일본은 박사학위를 쉽게 주지 않기 때문에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외삼촌의 말씀에 홀로 계셨던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셨다.

격동의 80년대와 민주화 운동의 여진 속에 살아온 나에게 일본은 너무나 평화로운 곳이었다. 소음이 없이 고요한 도쿄의 주택가, 상대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심, 당혹스러울 정도의 정치적 무관심과 소시민적인 자기 취향에 대한 집착은 격동기의 한국과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한 번은 민영TV가 역사 교육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시부야를 방문, '고갸루(여고생)'를 취재한 적이 있었다. 기자가 여고생에게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과 일본이 전쟁한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묻자 그 학생은 깜짝 놀라며 "정말이에요? 그런데 누가 이겼나요"라고 되묻는 어처구니 없는 영상이 방영된 적도 있었다. 어쨌든 일본은 격렬한 대립 속의 한국과 다른,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다른 나라였다.
그러나 같고 다름을 넘어 절대로 일본에서 배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 세 가지 있었다. 그것은 청소년의 이지메(왕따), 노인의 고독사, 그리고 젊은이의 무기력이다. 90년대 중반까지 이런 용어는 한국 사회에서 극히 생소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너무도 흔한 일상적인 용어가 돼 버렸다.

유학 첫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도쿄대 검도부에 가입한 유일한 외국인이었던 나는 법학부 4학년 선배(?)와 식사를 함께하게 되었다. 초 후지오 도요타 회장, 쿠니마쯔 다카지 경찰청 장관 등 유수한 인물을 배출한 검도부였으니 그 자부심은 대단했다. 더구나 도쿄대 법학부는 일본 관료의 중추를 배출하는 최고의 엘리트 양성소였다. 그 법학부 학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미래의 꿈이 무엇인가요" 그 학생이 주저없이 대답했다. "미쯔비시 물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순간 내가 당혹스러웠다. 다시 물었다. "취직이 아니라 당신의 미래에 대한 꿈을 묻는 겁니다." 오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대답했다. "미쯔비시 물산인데요…." 이런 대답은 단지 그 학생 한 사람만의 것은 아니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대학 강단에 섰을 때에는 또 한 번의 당혹스러움을 맛보아야 했다. 수업 중에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해 일본 학생들은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찬반 의사표시를 하라고 해도 대다수는 눈치만 보고 침묵했다.

그로부터 15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한국의 대학에서 당시 일본 학생과 똑같은 모습을 보고 있다. 학생들은 의사표시를 하지 않는다. 찬반을 물어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다. 그래서 개강 첫 시간에는 항상 학생에게 룰을 선언한다. "여러분이 찬반 의사표시를 하지 않으면 의견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싫으면 의견을 명확히 표시하라." 수업이 종강을 향해 갈 즈음이 돼서야 학생들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1966년 8월5일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모택동의 대자보에서 시작된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1976년까지 10년에 걸쳐 중국 전역을 뒤흔들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유교적 전통이나 문화는 반혁명적인 것으로 몰려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물론 문화대혁명의 본질은 반대파에 대한 권력투쟁이었지만 홍위병으로 대변되는, 젊은이들의 기존질서에 대한 부정이라는 또 다른 측면도 있었다. 기존 질서에 대한 중국의 부정은 한국의 386세대, 일본의 60년대 전공투 학생운동과도 궤를 같이한다. 그리고 훗날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과 항의는 새로운 창조에 대한 강렬한 에너지로 재생산된다. 세계 문화사에 획을 그은 일본의 애니메이션, 중국의 영화, 한국의 게임은 이러한 반항과 부정의 에너지를 토양으로 해서 자라난 창조물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낙심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의 청년들이 입시경쟁과 취업난 속에서, 기성세대의 압박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창조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의 젊은이들을 들여다 봐야 할 때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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