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만 해도 교수들이 연구년에 해외에 체류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자료수집이 그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지요. 외국 연구자들과의 공동연구도 물론 중요하고요. 그러나 이제 인터넷 접속이 되기만 하면 자료를 구하는 일은 세계 어디에서도 가능해지고 있고 외국 연구자와의 공동연구도 원격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니, 연구년을 해외에서 보낼 이유는 많이 줄어들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외국생활의 여러 가지 불편함에도 이곳에서 새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곳 친구들의 무서운 저력을 실감하게 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최근 제가 감탄한 것은 이들의 '기억력'입니다. 요 며칠 박물관과 미술관들을 돌아보면서 이들의 징그러운 기억력을 느껴 볼 수 있었습니다. 전시실마다 기부자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지만 계단 난간, 대형 전등, 프로젝터 등에도 예외 없이 기부자의 이름이 꼼꼼히 새겨져 있는 광경은 기가 질릴 지경이었습니다. 150여년 전 수백달러를 기부한 사람의 이름까지 되새김질하고 있다니! 그러나 이런 꼼꼼한 기억은 잠재적인 기부자의 지갑을 여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기부가 오래 기억되고, 투명하게 쓰일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 친구들의 기억력이 힘을 발휘하는 지점은 또 있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막 소위 재정절벽(fiscal cliff)을 완화하기 위한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습니다. 점쟁이는 아니지만, 저는 통과를 낙관했습니다. 언론과 여러 시민단체들이 통과되지 않으면 생길 문제들에 대해 여론을 환기시켜 정치권을 강하게 압박하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과거가 기억된다는 것은 사실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저 역시 제 실수와 잘못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빨리 잊혀지기를 바라며 삽니다. 그러나 공적인 영역에서 누군가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일들을 꼼꼼히 기록하고, 오래도록 기억하며, 그리고 널리 알리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이들의 지긋지긋한 기억력에 혀를 내두르면서, 두툼한 다이어리를 주문했습니다. 올해에는 제 손으로 직접 기록을 만들어 보려 합니다. 성실한 기록을 통해 조금 더 무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작정입니다.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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